‘대우차 사태’ 경찰서까지 찾아간 한국지엠 초대 사장 닉 라일리 [위크&인천]

입력 2024-06-15 11:15 수정 2024-06-15 11:52

해고 노동자 1천750명 전원 복직 ‘최대업적’

돈독한 노사관계로 아름답게 부평공장 떠나

종합 완성차 업체 위상에 큰 공헌

대우자동차의 새 주인이 된 제너럴모터스(GM)는 2002년 10월 28일 인천 부평 본사에서 ‘지엠대우’를 공식 출범했습니다. 닉 라일리(오른쪽 2번째) 지엠대우 초대 사장과 관계자들이 출범을 축하하는 모습입니다.  /경인일보DB

대우자동차의 새 주인이 된 제너럴모터스(GM)는 2002년 10월 28일 인천 부평 본사에서 ‘지엠대우’를 공식 출범했습니다. 닉 라일리(오른쪽 2번째) 지엠대우 초대 사장과 관계자들이 출범을 축하하는 모습입니다. /경인일보DB

모기업의 부도로 위기를 맞았던 대우자동차는 2002년 10월28일 ‘지엠대우(현 한국지엠)’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지엠대우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 닉 라일리 사장은 노동조합 집행부와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 직원들의 임금 수준을 한국의 다른 자동차 기업과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당시 부평공장 노동자들은 라일리 사장의 임금 인상 발언을 믿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대우자동차 워크아웃 이후 한없이 추락한 브랜드 이미지를 회복하는 일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임금을 올려주겠다’는 외국인 사장의 말은 그저 립서비스처럼 들렸기 때문이죠.

닉 라일리 사장은 직접 광고에 출연해 ‘대우’ 브랜드의 이미지 회복에 앞장섰습니다. 20초 분량의 광고에서 모든 멘트를 한국어로 직접 말하는 등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입니다. 2024.06.15 /지엠대우 출범 1주년 기념 광고 영상 갈무리

닉 라일리 사장은 직접 광고에 출연해 ‘대우’ 브랜드의 이미지 회복에 앞장섰습니다. 20초 분량의 광고에서 모든 멘트를 한국어로 직접 말하는 등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입니다. 2024.06.15 /지엠대우 출범 1주년 기념 광고 영상 갈무리

정리해고자 전원 복직·지엠대우 차종 확대… 잃어버린 신뢰 되찾고 ‘최대 실적’ 달성

라일리 사장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직접 광고에 출연해 한국어로 ‘더 좋은 회사로 발전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하는가 하면, 장기간 중단됐던 신차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잃어버린 경쟁력을 되찾는 데 주력했죠.

출범 4년 만인 2006년, 지엠대우는 역대 최고 내수 점유율인 10.5%를 기록하며 정상 궤도에 올랐습니다. 실적 반등은 임직원들의 보상으로 이어졌고, 라일리 사장은 모두에게 신뢰받는 인물이 됐습니다. 대우차 부도로 정리해고됐던 1천750명의 노동자 전원을 복직시키기로 한 결정은 그의 최고 업적이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라일리 사장은 역대 한국지엠 사장 가운데 노사관계 안정화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2006년 10월 그가 지엠대우를 떠나 GM 유럽지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부평공장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고별식을 마련했을 만큼 노사관계는 끈끈했습니다.

라일리 사장은 재임 기간 중 ‘대우’의 정체성을 강조한 사장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엠대우는 한국기업’이라고 자주 언급했고, GM의 수출기지가 아닌 지엠대우 독자적으로 차량을 개발해 내수 시장과 해외 시장에서 동시에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그의 경영 철학이었죠. 사장 취임 이후 경차부터 대형세단까지 전 차종의 라인업을 완성한 데 이어 2006년에는 부평공장 역사상 처음으로 생산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윈스톰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닉 라일리 사장은 지엠대우 사장으로 재임한 4년 동안 생산 차종 확장과 자체 개발을 적극적으로 진두지휘했습니다. 2006년 3월 부평공장에서 생산된 지엠대우의 첫번째  SUV  ‘윈스톰’ 생산현장을 찾은 릭 왜고너(차량 오른쪽 첫번째) 당시 GM 회장과 라일리 사장 등이 생산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경인일보DB

닉 라일리 사장은 지엠대우 사장으로 재임한 4년 동안 생산 차종 확장과 자체 개발을 적극적으로 진두지휘했습니다. 2006년 3월 부평공장에서 생산된 지엠대우의 첫번째 SUV ‘윈스톰’ 생산현장을 찾은 릭 왜고너(차량 오른쪽 첫번째) 당시 GM 회장과 라일리 사장 등이 생산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경인일보DB

유럽지사장 재임 시절 노사 진통에 ‘연봉 반납’ 파격… “대우는 GM의 핵심 사업장” 강조

1975년 GM에 입사한 라일리 사장은 GM 내에서도 해결사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습니다. 라일리 사장이 GM 유럽지사를 총괄하고 있던 1998년 영국 루튼 공장에서 임금체불 문제가 발생해 노동자들의 파업시위가 벌어졌는데, 노사협상이 진통을 겪자 그는 통 큰 결정을 내립니다.

회사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약 3억원에 달하는 자신의 연봉 전액을 받지 않고 회사와 노조를 위해 쓰겠다고 발표한 것이죠. 최고경영책임자가 먼저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노동자들도 마음을 열었고, 문제는 극적으로 해결됐습니다. 라일리 사장은 노사관계를 원만히 풀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내에서 능력있는 인물로 인정받았으니 GM에 대한 자부심이 강할 만도 했지만, 부평으로 온 라일리 사장은 대우차의 브랜드를 중시했습니다. 대우차와 부평공장이 그저 GM의 해외 사업장이 아니라, GM이 해외 자동차 시장에서 확고하게 지위를 굳힐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죠.

라일리 사장 재임 당시 지엠대우 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냈던 이성재 전 노조위원장은 “대우차는 1990년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과 동남아시아 지역 등 GM이 확보하지 못했던 해외 시장을 갖고 있었고 현지 평판도 좋았던 자동차 브랜드였다”며 “대우차 인수는 GM이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릴 기회였고, 이 때문에 라일리 사장은 지엠대우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고 했습니다.

닉 라일리 사장은 인천시와 부평구 지역사회에도 많은 관심을 찾고 활동에 나섰습니다. 라일리 사장(왼쪽 3번째)과 그의 부인인 수지 라일리(왼쪽 6번째) 여사가 2003년 11월 부평구 청천동에서 열린 ‘지엠대우 사랑의 김장담그기 행사’에 참여한 모습입니다. /경인일보DB

닉 라일리 사장은 인천시와 부평구 지역사회에도 많은 관심을 찾고 활동에 나섰습니다. 라일리 사장(왼쪽 3번째)과 그의 부인인 수지 라일리(왼쪽 6번째) 여사가 2003년 11월 부평구 청천동에서 열린 ‘지엠대우 사랑의 김장담그기 행사’에 참여한 모습입니다. /경인일보DB

부도·시위로 흉흉했던 인천과 부평 누비며 지역사회와 소통한 라일리 부부

라일리 사장은 지엠대우를 품고 있는 인천과 부평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습니다. 취임 1년째인 2003년 10월 부평경찰서를 방문했던 일은 당시 지역사회에서 화제가 됐다고 합니다. 대우차 사태 당시 노동자들의 시위가 지속하면서 부평경찰서 소속 경찰관들과의 충돌이 잦았고, 그 과정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대우차 노조원을 경찰이 폭행해 서장이 직위 해제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경찰과 노조원 사이 깊어진 감정의 골을 풀어내기 위해 라일리 사장이 직접 나섰습니다. 그는 부평경찰서를 찾아 “지난 5년여 동안 대우차 사태로 본의 아니게 고통을 받아온 부평경찰서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며 “앞으로 빠른 시일 내에 회사를 정상화시켜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대우차 시절부터 매년 열렸던 ‘사랑의 김장 담그기 행사’에 부인인 수지 라일리 여사와 함께 참여한 자리에서는 “지엠대우의 출범과 경영 정상화에 도움을 준 인천을 위해 더욱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칠 것”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수지 라일리 여사는 지엠대우 차량을 직접 운전하며 봉사활동을 다녔다고 합니다. 라일리 부부는 부도와 시위, 폭력사태 등으로 인해 대우차와 멀어졌던 인천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지역 곳곳을 누볐습니다.

노사화합 중시한 웨일스 신사, 74세 일기로 타계

영국 웨일스 태생인 라일리 사장은 지난 7일(현지 시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사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총 8명의 외국인 사장이 한국지엠의 운전대를 잡았는데요. 라일리 사장만큼 직원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고 노사관계를 중시한 인물은 없었다는 평가입니다.

라일리 사장은 재임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사 관계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습니다.

“노사관계 악화는 70%가 경영자 책임이라고 본다.
경영진은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경영진이 노조와 입장 차이를 좁히려면 노조 쪽으로 70%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노조도 30% 정도 앞으로 나오게 된다.”

닉 라일리 사장

경영자로서 노동자들에게 먼저 다가간 ‘한국지엠 초대 사장’ 라일리 사장의 행보는, 그가 부평을 떠난 지 20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한국의 노사 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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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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