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전 구로공단 여공 정애씨
청춘 함께 보낸 광명 보람채 아파트
‘국가 소유의 땅’ 지역과 동떨어져
市, 땅 구매 노력… 그리고 6년의 멈춤
가족의 삶, 나의 미래를 짊어진 그 시대의 청춘의 동앗줄
일당 3천300원, 월급 9만9천원. 아침 8시30분에 출근해 밤 10시는 넘어야 끝이 나는 근무. 40여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오정애씨는 참 고되고 힘들었어서, 이보다 못할 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현재’를 산다고 했다.
정애씨는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로 이름과 모습을 바꾼, ‘구로공단’에서 일했다. 1986년, 스무살을 막 넘긴 즈음부터 8년여간 구로공단에서 청춘을 보냈던 그는 우리가 한번쯤 들어 본, 이른바 ‘여공’으로 불린 청년노동자다. 그리고 가진 것 없던 그 시절, 나아질 것이라 희망을 쥐어준 것이 3년간 살았던 광명 보람채 아파트였다.
“구로공단에는 주로 전자회사, 봉제공장들이 많아서 거의 여공들이 일을 했어요. 가리봉역에 내리면 우르르 쏟아지는 여자애들에 떠밀려 공장까지 쭉 내려가는 풍경이 있었죠. 인건비가 워낙 싸니까. 가리봉 시장 쪽에 가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아주 좁은 방들이 늘어서있는데, 화장실도 없고 몸 하나 뉘일 공간 정도.. 화장실은 보통 1층 공용화장실 하나로 같이 쓰는데, 그렇게 열악한데도 월세 아끼겠다고 2~3명씩 같이 살았어요.”
이런 집들을 ‘닭장집’이라고 했고 또 가장 열악했다. 회사·구로공단에서 제공하는 기숙사들도 간혹 있었지만, 수준은 거의 마찬가지였다. 정애씨도 한때 공단 기숙사에 기거한 적이 있지만, 그때를 회상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방에 8~10명까지도 살았어요. 천으로 된 옷장 하나 놓고 누우면 끝나는 게 유일한 내 공간이었죠. 누우면 머리를 맞대고 누워야 하고 칼잠을 잘 수 밖에 없어요. 입사하고 한 6개월쯤 살았는데, 도저히 못살겠더라고. 그런데 철산리쪽에 아파트가 생긴다는 거에요. 구로공단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고. 입주자를 30명 뽑는데, 100명이 넘게 왔어요. 경쟁이 엄청 치열했는데, 제비뽑기로 뽑혀서 운좋게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보람채 아파트 첫 입주자가 됐어요.”
보람채도 14~15평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다. 그래도 방 2개·싱크대 있는 주방·화장실까지 있었다. 머리 뉘일 곳 밖에 없던 이전 숙소에 비하면 대궐같은 곳이라고 여기며 만족했다. 물론 이 곳에서도 한 집당 보통 5~6명이 살았는데, 정애씨는 5명이 함께 살았다고 했다. 좁은 화장실을 다같이 써야 해서 아침이면 출근전쟁을 벌여야 했지만, 퇴근하면 도란도란 모여서 국수도 삶아먹고 빨래도 널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공단에서의 근무는, 어린 나이의 여성청년이 감당하기엔, 많이 고되고 서글펐다. 오후 6시라는 퇴근시간은 서류상의 시간일 뿐이었다. 밤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근무는 선택권조차 없었다. 몸이 아프고 힘들어 쉬고 싶어도 그런걸 말할 수 있는 분위기조차 되지 못했다. 공장 관리자들은 어린 여공들을 이름 대신 “야” 라고 하대하며 욕하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일쑤였다. 또 대부분의 이들은 워낙 낮은 임금을 만회하려 야간근무를 해야만 하는 상황들에 놓이기도 했다. 왜냐면, 대부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 삶은, 빠르면 열여섯, 늦어도 스무살께 부터는 시작됐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엔 서울에서 아주 큰 버스들이 학교 앞에 줄지어 서 있어요. 졸업과 동시에 여자애들을 싣고 서울로 가는거에요. 대부분 구로공단에 있던 공장들이에요. 저는 부모님께 우기고 우겨서 고등학교까진 갔는데, 고등학교 졸업날도 똑같았어요.”
그렇게 서울로 실려오다시피 온 공장노동자 상당수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오빠 혹은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거나 딸린 동생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사연들이었고, 이들이 ‘닭장집’과 ‘철야근무’를 견뎌야 하는 이유들이었다.
“저는 집의 막내라 가족생계나 오빠들 학비를 책임지진 않아도 됐어요. 하지만 부모가 성인으로 첫발을 딛는 제게 쥐어준 건 이불 한채 뿐이었죠. 무조건 혼자 벌어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악착까지 모았어요. 야간까지 다 해야 한달에 12만원이 쥐어지는데, 그 중에 8만원을 적금으로 넣었어요. 보람채를 나올땐 250만원을 모았고 200만원 모은 친구랑 함께 ‘전세’로 마련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해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 기반이 돼 준 것이 보람채였다.
“그렇게 고생했어도 인생을 돌아봤을 때 그 시간은 참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보람채의 3년이 우리들의 기반이 돼줬고 또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하면서 조금씩 서로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힘이 됐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가진 것 없던 청년의 기반
보람채 아파트의 정식 이름은 ‘서울시립미혼여성근로자임대아파트’. 이름처럼 보람채 아파트는 애초의 취지가 구로공단 여성근로자에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1986년 근로청소년 임대아파트로 총 4개동이 1차 준공돼 200세대가 입주하며 약 1천명 정도가 살았다. 보람채가 아니라면, 당시의 주거환경이 워낙 열악했기에 수요는 계속 증가했고 1988년 5개동이 추가 준공되며 총 450세대로 늘어났다.
정애씨가 살았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후반까지는 정애씨와 같은 공장 노동자들이 대다수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며 디지털산업단지로 구로공단이 변화했고 입주할 수 있는 대상도 넓어졌다. 서울시내 업체 소속, 28세 이하 미혼 근로여성이면 누구나 입주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은 월급은 100만원 초반대의, 가난한 여성청년들이 대상이었다.
실제로 보람채를 위탁운영했던 한국청소년연맹이 발간한 ‘서울특별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 35년사’를 보면 2000년대 초반 입주자들 학력은 약 56%, 절반이상이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전선에 뛰어든 청년이었고 초대졸 이상이 41%로 그 뒤를 이었다. 처음 입주했던 1980년 후반, 중학교를 졸업하고 구로공단 공장에 취직한 여공들보다 학력 수준은 올라갔지만 학력별 임금 격차가 심했던 2000년대 초반을 감안하면 임금수준은 여전히 낮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21세기에서도 보람채는 가난한 청년노동자들의 ‘기반’이었다. 당시 임대보증금은 13평형이 23만7천220원, 월 임대료는 7천900원으로 매우 저렴했다. 이때에도 1세대에 4명이 함께 살며 난방·수도·전기·가스사용료와 같은 관리비는 함께 납부하며 부담을 줄였다.
가난한 여성청년노동자에게 든든한 바탕이 돼줬던 보람채는 2015년 폐쇄됐다. 딱 서른해 동안, 제 몸 하나 뉘일 곳 없던 낯선 서울 땅에 엄마 품 같은 따뜻한 보금자리를 주었다. 폐쇄 이후 이들 노동자들은 서울시가 마련한 또 다른 임대아파트로 이주하거나, 모은 돈으로 작은 집이라도 구해 독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고시원 등으로 옮겨 다시 21세기판 닭장집을 가야하기도 했다.
청년의 꿈 사라지고 방치된 보람채, 물거품된 광명의 노력
청년들이 떠나고, 보람채는 광명에 덩그러니 남았다. 보람채가 처음 건설됐던 1980년대야 국가가 도시개발의 모든 권한을 쥐고 흔드는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다손 치지만 문을 닫은 2015년은 지방자치시대가 도래한 지 23년이 되는 때였다. 1981년 광명시가 시작되고 43년이 흐른 2024년, 여전히 보람채는 국가 소유의 땅이고 건물이다. 오랫동안 광명에 살았던 토박이 시민들은 ‘광명에 있지만 광명과는 단절된 공간’이라고 보람채를 기억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 사는 곳이었다면 으레 소통하고 교류할 법도 한데, 그런 정 하나 없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후 철문만 굳게 닫힌 채 도시 속의 ‘섬’처럼 남겨졌다. 그것이 광명시민들이 서운하고 속상한 이유다.
이런 분위기를 잘 아는 탓에 민선7기 들어서부터 광명시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민선7기부터 광명시를 움직여온 박승원 시장은 2018년, 수년째 방치되고 있던 보람채 문제를 풀기 위해 서울시를 여러차례 찾아갔다. 어떻게 개발할지를 두고 여러 방면에서 논의를 이어가던 중, 돌연 서울시가 국가(기획재정부) 소유의 잠실땅에 국제교류단지 개발 계획을 세우며 보람채와 잠실땅을 맞교환했다.
“가난한 청년들을 위한 보람채의 역사를 계승하려면 여성청년노동자들의 근로·생활실태를 보존하는 기념관도 만들고 청년혁신타운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로 서울시랑 개발을 논의했었죠. 그 과정에서 기재부로 넘어갔는데, 차라리 기재부와 함께 보람채의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설득하는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정무적 판단도 했습니다.”
하지만 보람채는 또 광명의 노력과 입장과는 상관없이, 다시 원점이 됐다. 그리고 또 6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