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아임 프롬 인천·(29)] 성대모사의 달인, “Always 인천” 외치는 방송인 배칠수

입력 2024-06-26 13:00 수정 2024-06-26 13:40

어릴 적 형제들 손 이끌려 인천 올라온 막둥이

예체능 재능 보인 학창 시절…잠시 방황하기도

황해도, 충남, 호남서 대거 이주해 정착한 인천

다양성 도시선 배칠수 가족 등 모두 ‘인천사람’

 

99년 슈퍼보이스 탤런트 대회 우승하며 데뷔

25년 동안 라디오에서 활약…성대모사 달인

지난달부터 경인방송 새 프로그램 진행 맡아

“인천에서 동네사람 만나는 것처럼 반가워”

지난 10일 인천 미추홀구 경인방송 사옥 6층 스튜디오에서 만난 방송인 배칠수. 2024.6.10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10일 인천 미추홀구 경인방송 사옥 6층 스튜디오에서 만난 방송인 배칠수. 2024.6.10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올웨이즈(Always) 인천, 배칠수입니다.”

지난달 27일부터 경인방송(90.7㎒) 라디오 오후 4~6시 프로그램 ‘Always 인천’의 진행을 맡아 중저음의 편안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이같이 오프닝 멘트를 전하는 DJ 배칠수. 본명 이형민보다 예명 배칠수가 대중에게 더 익숙하므로 ‘아임 프롬 인천’ 스물아홉 번째 초대 손님으로 그를 방송인 배칠수라 소개하려 한다.

‘배칠수가 인천 출신이었어?’라고 되묻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1972년 전남 무안에서 칠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배칠수는 스스로 ‘인천 출신’이라 지칭하지 않지만, 자신이 ‘인천 사람’이라고 분명히 얘기한다. 그는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먼저 왔던 형제들 손에 이끌려 열살 무렵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방송인으로 데뷔한 이후 서울을 주무대로 활동했으나, 줄곧 인천을 보금자리로 삼았다. 인천이 배칠수처럼 많은 이주민의 보금자리로 꾸려진 도시임을 그의 이야기로 새삼 깨닫는다.

지난 10일 인천 미추홀구 경인방송 사옥 6층 스튜디오에서 만난 배칠수는 “인천 친구들에게 ‘내가 일을 다 그만두면 꼭 돌아올게’라고 얘기했던 것을 비롯해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 다시 인천에서 방송을 시작했다”며 “숭의동 자택에서 차로 8분 거리라 가까워서 참 좋다”고 말했다.

■누나들 손 잡고 인천 올라온 시골 소년

배칠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늦둥이 막내를 출산한 후 좀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무안에서 그를 자식처럼 키우던 누나들은 하나둘씩 인천으로 떠나 모여 살고 있었다. 누나들은 영특한 소년 배칠수를 두고 “크게 될 애를 고향에 두면 베린다(‘버린다’ 방언)”며 인천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배칠수 누나들은 1969년 조성된 수출공단 4단지(부평국가산업단지)나 1973년 들어선 수출공단 5·6단지(주안국가산업단지)에서 일하며 부평구와 계양구 등지에서 살았다. 자취하거나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인천 올라와서 처음 산 동네는 갈산동(부평구)이었고, 효성동(계양구) 갔다가, 청천동(부평구) 갔다가, 작전동(계양구), 병방동(계양구), 다시 부평으로 왔다가, 주안(미추홀구), 제물포(미추홀구), 가좌동(서구)까지 안 살아본 동네가 없네요. 그땐 형님과 누나들도 살기 빠듯한데 한 집에서 오래 머물기 어려웠어요. 형제들 집에서 돌아가며 살았죠.”

그가 인천으로 이주한 1980년대는 지금의 대도시 인천을 구성하고 있는 인구가 대규모 이주하는 막바지였다. 물론 최근 신도시 조성 등 대단지 아파트 입주에 따른 집단 이주가 있긴 하지만, 과거 지방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모습과는 성격이 다르다.

인천 수출산업공업단지 조성 기공식. /출처 인천시사

인천 수출산업공업단지 조성 기공식. /출처 인천시사

류제헌 한국교원대 교수 등이 2010년 8월 ‘인천학연구’ 제13호에 게재한 논문 ‘인천시 아이덴티티 형성의 인구·문화적 요인’을 보면, 타 지방에서 인천으로의 대규모 이주와 인구 구성 변화는 3개 단계에 걸쳐 나타났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1950년대 초반 일어난 황해도 출신 실향민의 피란 또는 집단 이주다. 타 지방에서 가장 먼저 인천으로 대거 이동한 황해도민들은 동구 만석동·송현동, 중구 북성동·송월동·답동 등지에 많이 정착했다. 대표적인 동네가 동구 송현동 수도국산 달동네다. 당시 인천은 전국에서 황해도 출신 피란민이 가장 많이 모인 지역이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갈 길이 막힌 고향이 가까워서다. 황해도민들은 배다리 중앙시장, 용현시장 같은 상권을 개척하고 발전시켰다.

1950년대 황해도민들의 이주가 비자발적이었다면, 이어진 1960~1980년대 충남 출신자들의 대규모 유입은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자발적 이주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인천에 공업단지가 조성됐다. 특히 당진, 서산, 태안 등 해로를 통해 인천과의 왕래가 원활한 지역에서 이주가 많았다. 이들은 대성목재, 대한중공업(현대제철) 등 대형 제조업체와 인접한 중구, 동구 등지에 주로 살다가 인천시의 성장에 따라 미추홀구(주안), 남동구 쪽으로 이동했다.

배칠수 가족 사례인 호남 지역 출신자의 대규모 인천 이주는 주안·부평수출공단과 남동공업단지(남동국가산업단지)가 활발하게 가동한 1980~1990년대에 주로 이뤄졌다. 충남 출신 이주민과 달리 호남 이주민들은 육로로 서울을 거쳐 인천으로 왔다. 서울 외곽에 인접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지역으로 진입하기 상대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또 앞서 황해도 출신과 충남 출신 주민이 중구, 동구, 미추홀구에 먼저 정착했으므로 호남 출신 주민들이 정착하기에 부평구와 계양구 등지가 무난했을 것이라고 류제헌 교수는 분석했다. 그들의 일터 또한 배칠수의 누나들처럼 대부분 부평구와 계양구 공업 지역이었다.

인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토박이가 적다’는 말의 인구사회학적 분석이다. 이러한 인천의 인구 구성은 현재까지도 지역별 향우회 활동, 지역 정치 지형 등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체능 소질 보인 학창 시절, 방황도 했지만

인천에 정착했으나 집안 사정상 초등학교는 고향에서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예체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미술에도 소질이 있었고 운동도 잘했다. 교실에선 늘 레크리에이션을 담당할 정도로 끼가 많은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성적도 좋았다. 중학생 배칠수는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여러 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방황하는 시기도 있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살아야 했던 배칠수의 학창 시절은 조금 힘들기도 했다.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얘길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미술대회에 나가면 누나들이 무엇이라도 사서 먹으라고 용돈을 주니까 그 맛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죠. 그런데 예술고 진학을 못하면서 인생의 큰 좌절이라도 겪은 것처럼 잠깐 공부를 놓고 말썽도 피우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주안이나 동인천 등지에 있는 나이트클럽이나 디스코텍(디스코클럽) 같은 곳에도 가봤는데, 이제는 다 공소시효가 지난 얘기입니다.(웃음)”

지금 시대 기준으로 불량 청소년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도 할 말은 있다. 청소년이 건전하게 여가를 보낼 장소와 수단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한 시대였다. 어른의 잘못도 컸다. 청소년들이 출입할 수 없는 디스코텍 등 유흥업소 가운데 일부 업소는 청소년 출입을 눈감았다. 서울과 인천 등지 번화가에선 아예 10대 전용으로 바꾼 불법 디스코텍이 성업해 사회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오죽하면 정부 차원에서 서울, 인천, 광주, 전주 등에 청소년을 위한 디스코장을 조성해 운영할 정도였다. 1991년 2월21일자 한겨레신문을 보면, 인천 서구 가좌동에 있던 인천 근로청소년 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전용 디스코장을 운영했다. 이곳에선 술 대신 청량음료를 줬으며, 어두컴컴한 성인 디스코텍보다 조명을 밝게 켰다. 어른은 ‘청소년의 보호자’만 출입할 수 있는 청소년만의 공간이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이 청소년 전용 디스코장에서 만난 한 청소년은 “요즈음은 토끼춤이 인기가 있어요. 껑충껑충 뛰면서 두 팔을 앞뒤로 흔드는 춤이죠. 이렇게 마음껏 흔들고 나면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셔요”라고 말했다.

고교생 배칠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형과 누나들에게 배운 것처럼 항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리는 기념품 제조 공장에서 잠시 일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특수에 힘입어 정부가 수도권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기념품 제조 산업을 한창 육성하던 시절이다.

“하와이로 수출할 기념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어요. ‘MAUI’(하와이 마우이섬)라고 쓰인 야자수 모양 기념품 같은 것을 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수출한 모양이더라고요. 학교에 나가기 싫어서 취업했는데, 이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제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구나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공장을 그만두고 학교에 다시 나가면서 공중전화 청소 아르바이트도 하고, 밤에는 학원을 다니면서 대입 시험 준비를 했어요. 그렇게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는 1991년 인천 동구 송림동에 있는 대헌공업전문대학 사회체육과에 진학했다. 지금의 인천재능대학교다. 인천재능대는 1970년 대헌전자공업전문학교로 설립돼 개교 초기 전자과, 전기과, 무선통신과를 운영해 기술자를 양성했다. 1974년 대헌공업전문학교로 교명을 개편하고 점차 학과를 증설해 1991년 전자과·정보통신과·전자통신과·전자계산과 등 공학계열 7개 학과, 경영과와 유아교육과, 사진과·사회체육과·생활음악과 등 예체능계열 3개 학과를 포함해 총 12개 학과 1천200명 재학생을 둔 규모 있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1997년 (주)재능교육 박성훈 대표이사가 학교법인을 인수해 재능대학 시대를 열었고, 2011년 인천재능대학교라는 ‘인천’을 붙인 교명으로 개편했다. 현재는 AI(인공지능), 웰니스, 호스피탈리티경영, 예술디자인, 미래창업학부 등 계열에서 27개 학과를 운영하며 5천명 이상이 재학 중인 인천의 대표 전문대학으로 입지를 다졌다.

방송인 배칠수. 2024.6.10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방송인 배칠수. 2024.6.10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성대모사 달인, 라디오 DJ가 되다

1993년 대학을 졸업한 배칠수는 보디빌더로 활동했고, 1997년 매형과 함께 계양구 계산동에 헬스클럽을 차리기도 했다. 수영선수인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헬스클럽은 성업했다. 방송인 데뷔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잉그리드 버그만, 맥 라이언, 임청하 등 해외 스타의 더빙을 전담했던 성우 귄희덕씨가 창설한 1999년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 출전하면서다.

“아내가 신문에서 대회 공고를 보고 상금이 100만원이라며 저 대신 참가 신청을 했어요. 제 목소리가 좋고 다른 사람 흉내도 잘 냈거든요. 헬스클럽 운영으로 바빠 대회에 나가기 싫었는데, 참가비가 꽤 되더라고요. 준비 없이 예선 대회장에 갔다가 다른 참가자들이 진지하게 준비하는 걸 보고, 저도 그 자리에서 상황을 짜고 목소리 연기를 해서 예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대회 주최 측에서 따로 연락이 왔어요. 대상 후보군이니 제대로 준비해 본선에 출전해달라고요. 제 성대모사가 동네에서 부린 잔재주인 줄만 알았더니 괜찮은 수준이었나봐요. 대상을 받았습니다.”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승한 그해부터 각종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는 2000년 9월부터 지금의 팟캐스트 격인 인터넷 방송국 ‘렛츠캐스트’에서 MBC 라디오 인기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패러디한 ‘배칠수의 음악텐트’를 진행하며 유명세를 탔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한 2000년대 초반 태동한 인터넷 방송의 대표 주자가 됐다. 본명 이형민으로 활동하던 그가 ‘배칠수’란 예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때다. ‘패러디’ ‘엽기’ 같은 문화 코드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인터넷 방송이 막 태동하면서 자본이 모이고, 괜찮은 라디오 작가들이 인터넷으로 진출하던 시기였어요. 친한 작가 형이 저와 함께 기획해보자며 제안한 인터넷 방송이 ‘배칠수의 음악텐트’였습니다. 진짜 배철수 형님이 ‘너 진짜 신기한 애다’라며 연락했고, 그때부터 배철수 형님과 친하게 지냈죠. 이를 계기로 진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철수와 칠수’라는 코너로 오랫동안 출연했습니다.”

성대모사의 달인. 그를 20년 넘게 라디오 DJ로 활약하게 한 원동력이다. 역대 대통령들과 거물 정치인들 모사는 기본이고 배철수, 최양락, 손석희 같은 방송인에 차범근, 이승엽, 허재 등 스포츠 스타, 황수관이나 앙드레김 같은 문화계 인사까지 성대모사를 할 수 있는 인물이 50명쯤 된다고 한다. 단순히 목소리를 따라하는 수준이 아니라 시사 풍자의 영역으로 현실에 접목한다. 성대모사로 유명한 방송인 가운데서도 어마어마한 연습량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다큐멘터리나 TV 프로그램 내레이션으로도 배칠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정치·시사 풍자를 다루는, 그것도 한 인물을 복사기처럼 똑같이 표현하는 방송인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방송 활동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0년 이상씩 진행하던 프로그램들에서 덜컥 하차하게 됐을 때다. 지금까지도 시원하게 말하지 못할 민감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정치 풍자를 하려면 가장 먼저 대통령이 돼야 하잖아요. 대통령이 바뀌면 그것부터 연습하는 거죠. 목소리를 먼저 만드는 건 아니고, 반대로 라디오에서 하는 콩트나 상황극 시나리오가 주어지면 그 내용에 맞춰 인물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와중에 제가 그 사람의 심정이 돼 보려고 항상 노력해야 하죠. 지금의 대통령만 보더라도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바뀌잖아요. ‘오늘은 이 인물이 이런 기분일 거야’ 같은 미묘한 심경 변화를 집중력 있게 캐치해야 합니다. 제가 성대모사한 인물 중에 가장 애정이 있는 사람은 한참 열정적으로 활동한 시기에 목소리를 연기했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인 것 같습니다.”

인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계양산 정상. 방송인 배칠수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경인일보 DB

인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계양산 정상. 방송인 배칠수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경인일보 DB

■17년 만에 라디오로 다시 만나는 인천 시민들

경인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DJ를 맡은 건 2007년 ‘안녕하세요 배칠수입니다’ 이후 17년 만이다. 청취자가 보내는 사연에서 나오는 장소 대부분이 잘 아는 곳이라 동네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라고 한다.

반평생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 배칠수는 라디오란 매체에 대해 “우리가 일을 하거나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옆에서 비교적 들을 만한 이야기를 중얼중얼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일상에서 흔히 지나치는 소리이면서도 한번 정도 귀를 기울여 보면 들을 만한 이야기나 노래가 나오는 그런 매체가 배칠수의 라디오다. 좋은 이야기와 노래를 부담 없이 들려주는 가까운 친구 같은 DJ가 되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인천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계양산을 꼽았다.

“어렸을 때 많이 올라갔어요. 계양산 꼭대기에선 인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죠. 어린 시절 계양산 정상에선 세상이 정말 선명하게 보였는데, 요새 올라가서 보면 많이 탁해지긴 했네요. 그래도 인천 하면 저는 계양산을 꼽겠습니다.”

‘아임 프롬 인천’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제작하는 경인일보 콘텐츠영상팀 PD가 성대모사를 주문했을 땐 그의 평생 장기 ‘배철수’의 목소리로 유감없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홍보했다.

“배철수입니다. 제가 직접 가서 좀 얘기해 드려야 하는데, 목소리만 보냅니다. 배칠수의 Always 인천, 이거 끝나면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이어지는데요. 많이 청취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잘돼야 진짜 배철수도 한 번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방송인 배칠수. 2024.6.10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방송인 배칠수. 2024.6.10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약력
1972년 전남 무안 출생
1985년 해제초등학교 졸업
1988년 부평서중학교 졸업
1991년 세일고등학교 졸업
1993년 인천재능대학교 사회체육과 졸업
1999년 슈퍼 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 대상
2003년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시트콤부문 신인상
2003년 SBS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2005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특별상
2010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2017년 제29회 한국PD대상 라디오 진행자부문 출연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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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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