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

애향심이 움직였다, 멈춘 지역의 시간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3)]

입력 2024-06-27 18:33 수정 2024-06-2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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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 개발 자치권 되찾기 나서

‘보람채 시민모임’ 1만 서명 성과

구로차량기지 이전 막아낸 역사도

지역 개발 권한에 변화 맞을 시점

나고 자라야지만, 애향심이 발휘되는 건 아니다. 직장을 다니기 위해, 결혼으로 인해, 혹은 집값에 밀려, 다양한 이유로 이주해왔고 정착했지만 그 삶이 이 곳에서 계속된다면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게 애향심이다. 경기도의 ‘위성도시’들이 도시를 개발하는 데 갖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바탕에 시민들이 있었고, 애향심이 원동력이 돼 국가주도 개발의 불합리성에 맞섰다. 그리고 이렇게 시민주도로 개발 자치권을 되찾는 움직임들이 최근들어 늘고 있다.

개인이 시작한 서명운동, 광명시민 1만2천명이 응답하다

김성동씨는 매일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보람채 아파트가 궁금했다. 광명 한복판에, 낡은 아파트가 너른 부지를 차지한 채 방치된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알아보니, 국가소유의 땅이라 광명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란 걸 알게됐다. 고심 끝에 그는 기획재정부로부터 보람채 아파트를 돌려받자는 취지의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오가는 길에 수풀가득한 채 방치된 보람채 아파트를 보면서도 무엇인지 잘 몰랐던 광명시민들에게 일일이 보람채를 설명했다. 길 건너 옛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가가 광명에 지은 임대아파트이면서 이후엔 서울 관내 직장에 재직하는 저소득 여성노동자를 위해 운영됐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이제는 보람채가 광명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용기있는 움직임에 하나 둘 시민들이 움직였다. 그렇게 광명 하안2동과 4동 시민 16명을 주축으로 한 시민모임이 탄생했다. 시민모임 회원들은 밤낮없이 광명시내를 돌며 서명운동에 매진했다. 일면식도 없는 시민들에게 다가가 보람채의 역사를 설명하고 설득했다. 함께 마음을 모은 끝에 6개월만에 광명시민 1만2천여명이 서명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렇게 시민 간의 연대는 정부에 빼앗긴 지자체의 ‘개발 자치권’을 되찾는 동력이 됐다.

성동씨를 비롯한 시민모임은 지난해 11월 보람채 소유주체인 기획재정부에 서명부를 전달했다. 성동씨는 “우리가 큰 힘이 될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광명 한복판에 건물이 흉물로 남아 있는데, 시에서 개발을 하고 싶어도 광명 땅이 아니다 보니 건들지도 못하는 게 안타까웠고 그런 마음들이 모이게 됐다”고 취지를 말했다.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에 힘입어 광명시도 꽤 오래전부터 나서 적극적으로 보람채 아파트 문제에 나서고 있다. 2024.6.23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에 힘입어 광명시도 꽤 오래전부터 나서 적극적으로 보람채 아파트 문제에 나서고 있다. 2024.6.23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에 힘입어 광명시도 꽤 오래전부터 나서 적극적으로 보람채 아파트 문제에 나서고 있다. 2018년 민선7기 취임 초기부터 이 문제에 천착해온 박승원 광명시장은 “서울시와 한창 부지 개발과 관련해 논의 중에 기획재정부로 소유가 이전되면서 당시 기재부에 편지를 썼다. 우리 시민들이 이 부지를 아파트로 개발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광명시와 협의 하에 청년 창업 허브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편지였다”고 설명했다. 기재부가 주관하는 국유재산정책심의회까지 찾아가 광명 중심의 개발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해 온 끝에, 현재는 기재부와 원활하게 보람채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박 시장은 “시민들이 보람채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두고 굉장히 궁금해한다. 연초 시민과의 대화를 할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 중 하나일 정도”라며 “k청년혁신타운 복합공간 조성 등 시민들 의견과 보람채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광명시 주도의 계획들로 협의해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시민들 스스로 되찾는 ‘도시개발 자치권’, 시민 사회 움직임 주목

지난 18일 광명 밤일마을에서 만난 박철희 구로차량기지이전백지화 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 2024.6.18/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지난 18일 광명 밤일마을에서 만난 박철희 구로차량기지이전백지화 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 2024.6.18/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도시개발 자치권을 되찾기 위해 시민들 스스로 민의를 모으는 움직임은 경기도 내 곳곳에서 꾸준히 있어왔다. 특히 광명의 경우 보람채 아파트 부지 개발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있기 이전, 밤일마을에서 주도했던 ‘구로차량기지 이전 반대운동’이 있었다.

박철희 구로차량기지이전백지화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위원장은 밤일마을에서 나고 자란 광명토박이다. 그가 어린시절부터 지켜봐 온 광명은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서울에서 소화하기 힘든 각종 혐오시설이 떠밀려오는 경우를 종종 접했다. 차량기지 이전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차량기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알자마자 일부 시민들이 급하게 시를 찾아갔는데 국토교통부에서 이미 전략환경영향평가 공람을 이미 시작했습니다. 막상 밤일마을에 사는 주민 500여명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 말이죠.”

박 위원장은 차량기지가 들어서면 도덕산의 허리가 끊길 것을 우려했다. 도덕산은 하안동, 철산동, 광명동을 가로지르는 광명의 주요한 생태 통로다. 이때의 긴박한 상황에 대해 박 위원장은 “광명이 8만5천평 차량기지 박물관으로 전락할 뻔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바로 행동에 나섰다. 주민총회를 열어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했고 박 위원장과 밤일마을 주민 4명이 주축이 돼 국토교통부 전략환경영향평가서를 분석했다.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시민들의 입장을 모은 의견서를 국토부, 기재부, KDI 등에 수차례 전달했다.

이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커지자 광명시도 나서기 시작했다. 광명시도 2019년 5월 시민과 힘을 합해 차량기지 이전을 막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해 12월 광명시가 함께하는 민관정 공대위로 전환됐고 집회와 현수막을 비롯해 시민들의 손편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지 이전 반대의 목소리를 표현했다.

그 결과 2020년 9월, 정부는 구로차량기지 이전 타당성 재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고 지난해 5월 최종적으로 차량기지 이전은 백지화됐다.

공대위는 현재 지난했던 5년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기록화 사업은 제2의 밤일마을이 될지 모르는 지자체를 돕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시민 주도로 도시개발자치권을 찾아온 밤일마을 사례를 선례로 남기겠다는 게 목표다.

“조그마한 반딧불을 기대하자면, 한국에서는 중앙행정으로부터 (자치권을 빼앗기는) 불합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자체가) 대응하는 법을 모르는 경우도 많고요. 다른 지자체나 소규모 마을 등이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면 우리가 좋은 선례가 됐으면 하죠. 우리를 참고해서 용기를 얻고 목소리를 내었으면 합니다”

경기 북부와 서울 외곽을 잇는 교외선 전철을 다시 달리게 한 사례는 양주시민들의 영향이 컸다. 국토교통부가 운영 적자를 이유로 지난 2004년 교외선을 일방적으로 멈췄다. 열차가 정차했던 역들 모두 문을 닫았고 철로는 녹슬어 흉물으로 방치됐다.

지난 20일 양주시 장흥면 마을회관에서 신기창 삼상2리 이장을 만났다. 2023. 6. 20/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지난 20일 양주시 장흥면 마을회관에서 신기창 삼상2리 이장을 만났다. 2023. 6. 20/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그러다 양주 장흥면 삼상2리 이장인 신기창(76)씨가 2011년, 교외선 재개통을 요구하고 나섰다. 교외선이 멈추고 생계를 위협받는 이들이 생겨났고, 이동이 어려워진 시민들이 불편함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씨는 “당시 마을 사람들 모임에 가서 교외선 중단 소식을 처음 접했다. 사전 협의조차 없었다”며 “교외선이 지나는 양주, 고양, 의정부 주민 모두 교외선 개통을 바랐는데, 양주에 정차역이 많아 양주시민의 바람이 컸다”고 당시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후 그는 3천여명이 서명한 ‘교외선 재개통 요구안’을 정부에 전달했고 이후 교외선 재개통 논의가 본격적으로 재개됐다. 그 결과 오는 12월 재개통을 앞두고 있다.

개발 자치권 보장 위해 ‘지방자치단체’ 중심 협의 테이블 확대돼야

경기도 위성도시들이 국가 주도의 개발에 시달려온 것은 어쩔 수 없는 과거다. 하지만 경기도 지자체와 시민들의 지방자치 정신이 성숙해짐에 따라 이제 도시개발의 자치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 또한 국가가 인정해야 하는 ‘시대적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자치권을 빼앗긴 공간에 대해 해당 지자체를 중심으로, 민주적인 토론과 열린 협의가 가능한 협상 테이블이 확대돼야 한다는 게 시민들과 경기도 지자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전문가들은 관행처럼 이어졌던 국가 중심의 개발행정이 아닌, 시민과 지역의 목소리를 듣는 ‘사전협상’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2024.6.23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전문가들은 관행처럼 이어졌던 국가 중심의 개발행정이 아닌, 시민과 지역의 목소리를 듣는 ‘사전협상’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2024.6.23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이미 개발 자치권 보장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사례들이 있다. 서울 용산구가 양주시 백석읍에 방치 중인 ‘용산구민 휴양소’를 용산구 치매안심마을로 조성하려던 계획을 두고 양주시민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양주시와 시의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용산구에 반대의사를 전달했고 그 결과 사업이 철회됐다. 이후 양주시와 용산구는 ‘두 자치단체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안’을 도출하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실무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광명 보람채 아파트 역시 광명시가 기획재정부와 함께 적극적으로 광명 중심의 개발 계획을 마련하는데 논의를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관행처럼 이어졌던 국가 중심의 개발행정이 아닌, 시민과 지역의 목소리를 듣는 ‘사전협상’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허훈 대진대학교 행정정보학과 교수는 “시민의식의 성장으로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나서 공공갈등을 해결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는 추세”라며 “시민이 사적이익이 아니라 공공성을 위해 행정을 주도한 여러 사례들이 쌓이고 있다. 시민의 제안도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이 바뀐 것이다. 단순히 시민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제안하고, 시민의 힘으로 이뤄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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