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아임 프롬 인천·(30)] 원대로 윌트벤처빌더 대표 “한국인 반골 기질은 스타트업 소스”

입력 2024-07-10 14:31 수정 2024-07-17 09:22

주안 가장 활발할 때 유년시절 보내

해외문화 관심 많아 경영학과 진학

삼성물산 시작으로 다양한 일 경험

한국기업 해외진출 자문 지원 총괄

“국내서 단련된 서비스 경쟁력 있어”

스타트업 해외 진출 길잡이 되고 싶죠,
시행착오는 나 하나로 끝내자는 생각입니다.

원대로 윌트벤처빌더 대표

원대로 윌트벤처빌더 대표/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원대로 윌트벤처빌더 대표/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1970~1980년대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은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 1900년대 초반부터 주안 일대에 퍼져 있던 대규모 염전은 1970년 매립공사가 시작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는 국가 주도 산업단지인 ‘주안공단’이 들어섰다. 공단 주변에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주안사거리와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도심이 성장했다.

아임프롬인천 서른 번째 주인공 원대로(54) 윌트벤처빌더 대표의 유년 기억은 이곳 주안에서 시작된다. 그는 국내 스타트업의 동아시아 진출 컨설팅과 유망 기업의 금융 투자, 경영 등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VC) 스타트업을 이끌고 있다. 한국·싱가포르 벤처 투자 전문가인 원 대표를 만나고 관련 인물·자료를 찾아 보니, 40~50년 전 인천 주안의 변모와 활기를 빼놓고 그를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었다. 소년 원대로가 주안에서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택했던 도시, 주안에서의 삶

원 대표는 1970년 외가가 있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모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비슷한 시기 그의 조부모도 함경도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늦둥이 막내 아들이 귀한 손주를 낳자 고령이었던 그의 친할머니는 ‘원대로’ 다 이루었다며 기뻐했다. 당시엔 순한글 이름이 생소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큰 길(大路)이라는 의미의 한자를 붙였다.

셋째 동생이 태어나기 전 어린시절 원대로(맨 왼쪽) 대표 가족사진/원대로 제공

셋째 동생이 태어나기 전 어린시절 원대로(맨 왼쪽) 대표 가족사진/원대로 제공

인천에서 태어났지만 원 대표 가족은 충북 청주에 그가 5살이 되던 해까지 살다 상경했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발령받으면서다. 1977년 주안국민학교(현 주안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의 가족들은 인천 남구 주안에 자리를 잡았다. 부친은 학교를 그만두고 목재 수입 사업에 나섰다. 아파트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때다.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을 수입해 아파트 건축·인테리어 자재로 팔았다. 어린 원대로에게 공장에 쌓인 원목은 장관이었다. 그는 “큰 트레일러 여러 개를 연결해 놓은 크기였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반 나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고 기억했다.

공장은 인천 주안역 뒷편 북구(현 서구) 가좌동에 자리했다. 가족은 시민회관사거리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주안공단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과 가족들이 모여 살면서 양옥 형태 주택이 많이 지어졌다. 주안사거리와 시민회관사거리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1970년대 이전 주안에서 볼 수 있었던 ‘시골 풍경’도 자취를 감췄다.

주안2동 주택가에 주차된 아버지 자동차 옆에서 찍은 막내 남동생과 원대로 대표 사진/원대로 제공

주안2동 주택가에 주차된 아버지 자동차 옆에서 찍은 막내 남동생과 원대로 대표 사진/원대로 제공

인천시가 집필한 ‘도시마을 생활사-주안동’에는 ‘주안공단’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970년대 북구 가좌동에는 한국제재공단이 조성됐고, 주안지구로 분류됐다. 이 공단에는 나왕·미송 등 목재를 다루는 업체 30개가 입주해 있었다. 나왕은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평균 높이가 40m인 목재자원으로, 주로 합판재나 가구, 악기 등을 만드는데 쓰인다. 미송은 북아메리카 주에서 자라는 평균 높이 100m, 지름 13m의 거대한 소나무로, 건축과 토목, 선박 건조용으로 쓰인다.

5대째 인천 주안국민학교 인근에서 살아온 구본형(61)씨는 1970년대 중반 주안을 ‘윤택했던 마을’이라고 표현했다. 구씨는 “주안은 굉장한 시골이었지만, 70년대부터 옛 초가집과 기와집이 헐리고 슬라브지붕으로 된 양옥집이 많이 들어서며 신도시처럼 변했다”며 “당시 우리나라가 윤택했던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주안은 잘사는 동네로 인식이 됐다”고 했다. 이어 “주안공단에 다니던 월급쟁이들이 주택을 사서 주안사거리쪽에 자리를 잡고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했다. 주안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당시(1970년)엔 4반이었던 학급 수는 전학 온 친구들이 점차 많아져서 1976년 졸업 때 6반으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부터 인천에 사는 총 가구 중 남구에 사는 가구 비율은 꾸준히 증가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인천 인구 10명 중 4명이 당시 남구에 거주할 정도로 인구 밀집도가 높아졌다. 새로 유입된 인구는 주안동, 숭의동, 도화동에 밀집했다.

1974년 주안동 190-4번지에 건립된 인천시민회관은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이었다. 2000년에 철거 이전까지 인근 초등학교 상당수는 학예회와 졸업식을 이곳에서 진행했다. 시민 다방과 지하 식당가는 동네 사람들이 선을 보는 장소로 유행하기도 했다. 그 자체로 랜드마크 역할도 했다. 서울로 향하는 주민들은 인천시민회관과 주안사거리에서 직행버스와 택시를 탔다.

주안에는 자연스럽게 중산층 가정이 모여 살았다. 원 대표는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또래에 비해 해외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1970년대 인천 남구에 한국스카우트 미추홀지역대가 설립됐다. 학교 단위로 운영되는 스카우트보다 지역대의 활동이 더 활발했다. 주안에 모여 살던 이웃들은 각 가정에서 비용을 각출해 매주 일요일 버스를 빌려 스카우트 활동을 했다고 했다.

원 대표는 용산 미군 부대에 방문해 미군 자녀들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함께한 경험도 있다. 그는 “탄산음료가 귀했던 시절에 음료 판매트럭에서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음료들이 펼쳐져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금발머리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1년부터 인천에서 스카우트 활동을 해온 최해경(53)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 사무처장은 “당시에 스카우트 활동을 하러 아이들이 미군부대에 들어가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박상도 미추홀지역대 초대 단장이 스카우트 단원들과 함께 용산 미군 부대에 방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1980~1990년대 지역대를 이끌던 단장들은 교사가 아닌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직장인, 자영업자 등 평범한 ‘스카우트인’이었다”며 “이들은 아이들에게 지역 사회를 이끄는 리더의 자질과 모범적인 사회 구성원의 면모를 스카우트 정신으로 강조했다”고 했다.

1982년 8월 전북 무주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 태평양잼버리 겸 제6회 한국잼버리 대회 참여한 인천미추홀지역대. 맨 앞 줄 맨 왼쪽이 원대로 대표다./원대로제공

1982년 8월 전북 무주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 태평양잼버리 겸 제6회 한국잼버리 대회 참여한 인천미추홀지역대. 맨 앞 줄 맨 왼쪽이 원대로 대표다./원대로제공

원 대표는 1982년 8월엔 전북 무주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 태평양지역 국제 잼버리’에 참가했다. “일주일정도 진행된 야영대회에서 각국을 대표해 참가한 아이들과 함께 텐트를 짓고 마을를 만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수도 시설이 야영지까지 연결돼 있지 않아서 강가에 가서 씻기도 하고 밥 먹은 걸 설거지하고 그랬답니다.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을 처음 본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에 따르면 인천지역 스카우트는 1923년 조선소년군 인천지부를 뿌리로 한다. 이후 1937년 일제에 의해 보이스카우트 운동은 강제해산됐다. 1947년 인천보이스카우트 재건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 말부터 지역 단위의 스카우트 활동과 초·중·고등학교 단위의 스카우트 활동이 활발해졌다. 1985년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 소속 대원은 2만 3천여명에 달했다. 1986년에 경북 경주에서 열린 잼버리 대회에는 인천연맹 소속 대원 300명이 참가했다.

1986년 제물포고에 입학한 원 대표는 반장을 도맡는 우등생면서도 놀기 좋아하는 활발한 학생이었다. 원 대표는 고등학교 3학년 학력고사를 앞둔 여름방학에 두 손목을 다쳤다. 당시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지름길로 창문을 넘나들었다. 그도 여느 날처럼 창문을 넘어 신속하게 나가려다가 떨어지면서 양 손목을 다쳤다. 입시를 100일가량 앞둔 시기에 양 손목에 깁스를 했고, 시험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재수를 했다.

인천 주안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노량진 재수종합학원인 ‘대성학원’을 다니며 2년 간 수험생할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쯤 인천에서도 단과 학원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재수생들이 다니는 재수종합학원은 인천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노량진의 대성학원에는 제주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의 재수생들이 모였다.

■배낭여행 1.5세대, 세계로 첫발을 내딛다

원 대표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91학번으로 입학했다. 해외에 대한 동경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경영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당시에 대학교에 입학하는 애들이 뭘 알겠어요.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경영학과는 학문의 폭이 넓어 졸업 이후에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기업에 취업을 할 수도 있고, 회계사가 될 수도 있고, 대학생활을 하면서 진로를 결정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가장 자유도가 높은 과를 선택습니다.”

국내에서는 1989년 1월 해외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는 정부에서 허가를 받은 외교관, 종합상사의 해외 주재원 등만 해외 출국이 가능했다. 원 대표는 군 제대 후인 1995년 3주간 서유럽으로 첫 배낭여행을 떠났다. 당시 그는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공부에만 매진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유럽으로 떠났다. 영국 런던에 도착해 도시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설렘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1990년대 중반 한국에선 국민소득이 1만불을 돌파했을 시점이었습니다. 유럽 도시에서 느껴지는 경제 수준 격차가 매우 크게 다가왔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해 집으로 향하는데 원래 살던 동네가 갑자기 엄청 가난한 동네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인생 첫 배낭여행 이후 공부에만 전념하겠다는 다짐은 사라졌다. 오히려 다른 선진국을 더 경험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자고 결심이 섰다. 1997년 IMF로 경기 불황이 이어졌지만, 대기업은 대학생들의 해외 탐방을 대규모로 지원했다. 원 대표는 1996년에는 삼성화재가 주최하는 미얀마· 베트남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했고, 1997년에는 삼성그룹과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하는 중국 베이징(Beijing), 서울(Seoul), 도쿄(Tokyo)의 앞글자를 딴 ‘베세토(BeSeTo)’ 해외연수에 참여해 한·중·일 각 국가의 도시를 2주간 탐방했다.

1996년 삼성화재가 주최 미얀마· 베트남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한 원대로 대표(사진 맨 오른쪽)/원대로 제공

1996년 삼성화재가 주최 미얀마· 베트남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한 원대로 대표(사진 맨 오른쪽)/원대로 제공

대우그룹 해외 탐방에 참여했던 원대로 대표(사진 오른쪽)/원대로 제공

대우그룹 해외 탐방에 참여했던 원대로 대표(사진 오른쪽)/원대로 제공

그중에서도 원 대표는 1997년 7월 대우그룹의 해외탐방에 참여했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고 했다. 당시 대우그룹은 ‘세계 경영’을 목표로 해외 공장을 인수했다. 그는 영국에 있는 대우자동차 디자인 연구소, 대우차가 인수한 폴란드 국영기업, 프랑스에 있는 대우전자 전자레인지 공장을 탐방했다. 그는 “해외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유럽의 엄청난 규모의 공장 앞에 태극기와 대우 마크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에 내가 다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상사맨부터 벤처 캐피털 스타트업까지

대학 졸업이 가까워 오자 원대로 대표는 해외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해 고민했다. 최근에는 어느 기업이든 해외에 현지 법인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 해외에 나가는 기회들이 많지만, 1990년 말까지만 해도 국내 대기업 그룹도 해외 사업은 종합상사에 맡기는 구조였다.

대학생 때 삼성그룹에서 대외활동에 참여한 것이 인연이 돼 1999년 삼성물산 국제업무 파트에서 첫 사회생활을 했다. 그가 처음 속한 곳은 정보통신 사업부였다. IT기기 수입과 수출을 하는 부서였다. 원 대표는 국내 중소기업의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일을 담당했다. 삼성전기 계열사 제품을 유럽 쪽에 판매하고, 위성 방송용 수신기기인 ‘셋톱 박스’를 러시아 시장에 진출시켰다. 이밖에도 최초의 MP3 플레이어인 ‘세한 엠피맨’, ‘보이스 팬’ 등 당시 중소기업에서 새롭게 출시된 전자 제품들을 두루 취급했다.

1990년 후반에는 개인 컴퓨터와 인터넷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인터넷 관련 기업이 급성장하는 이른바 ‘닷컴(.com) 붐’이 불었다. 원 대표는 “종합상사에서는 물건을 잘 팔면 된다는 생각으로 10~20% 가격을 깎는 것에 목을 매곤 했다”며 “IT·인터넷 기기 등을 다루던 중소 기업들이 투자를 받아 코스닥 상장을 하고, 회사 매출이 크게 증가하는 걸 지켜보면서 유망 중소 기업에 자금을 대고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에 관심이 생겨 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원 대표는 2000년 상사맨을 그만두고 현재 한국의 1세대 벤처캐피털 전문 기업으로 불리는 KTB 네트워크로 옮겼다. 그간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과 동남아 벤처 기업에 투자를 담당했다.

원 대표는 “당시 금융회사에선 여권 있는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여권은 신혼여행 갈 때나 만든다는 인식이 컸다”며 “2000년 이전까지는 각 기업들은 국내 사업만 해도 괜찮았지만, 점점 국내에도 해외 자본이 유입되고 국내에서도 해외 업체에 투자할 기회도 생기면서 점차 시장이 국제화됐다”고 설명했다.

2000년에 들어서자 중국에서는 알리바바 등이 급부상해 중국으로 해외투자가 집중되는 추세였다. 이에 발 빠르게 동남아 쪽의 투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원 대표는 2006년을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파견을 나갈 기회를 얻었다. 이후 2009년부터 KTB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장을 지냈고, 2013년 현대투자증권(현 KB투자증권)을 거쳐 2016년 벤처기업 컨설팅 스타트업 ‘윌트 벤처 빌더’를 창업해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창업 후 첫 컨설팅은 싱가포르에서 만난 아내가 이끌어 온 화장품 e-커머스 사업이다. 중국에 아모레퍼시픽, 엘지 등 한국의 대기업 화장품 브랜드들이 진출하기 시작했을 무렵, 싱가포르에서도 한국 화장품에 대한 수요가 커지던 때였다. 그가 한국 제품을 싱가포르 온라인에서 팔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냈고, 아내가 판매할 화장품을 골라 유통하는 ‘MD’ 역할을 하며 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이후에는 한국 기업들과 스킨십을 늘렸다. 국내 기업이 싱가포르나 동남아 진출할 때 자문을 구해서 초기에 스타트업 교육을 하고 있다. 창업자와 동업해 초기 스타트업 컨설팅, 자금 투자(벤처캐피털), 기업 육성·성장(엑셀러레이터)까지 총괄하고 있다.

원 대표는 한국인이 스타트업과 궁합이 잘 맞는다고 했다. 그는 창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고정 관념과 기존의 레거시를 깨부셔야 사업이 성공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려면 수동적이기보단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기질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 사람들의 ‘반골 기질’이 아이디어의 소스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한국 소비자들은 서비스 기대 수준이 높아, 한국 시장을 경험한 창업자는 해외 시장 진출에 유리하다고 분석한다. 그는 “한국 기업이 제공하는 UI(사용자 환경), UX(사용자 경험) 등 서비스 질이 높다”며 “도전적인 창업자가 단련된 서비스 수준 가지고 해외 시장에서 창업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했다.

■출향 이후 싱가포르에서 본 인천

인천은 이민자의 도시다. 지난해 6월 인천에서는 재외동포청이 문을 열었다. 원 대표는 싱가포르 국적의 아내와 결혼 후 2010년 영주권을 취득했다. 시민권까지 취득하면서 싱가포르 국적이 됐다.

원 대표는 국제 금융과 무역 중심지인 싱가포르가 공항·항만으로 대한민국 관문의 역할을 하는 인천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했다. “인천은 해양도시이면서 물동량이 많은 물류 도시이지만 동시에 인프라가 갖춰진 도심이기도 합니다. 도시에 공항, 카지노가 있는 싱가포르와 유사한 점들이 많습니다.”

해외 투자 환경과 국내 기업의 진출을 위해 일하는 컨설턴트로서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원 대표에게 물었다. 그는 “인천을 국내의 역외(off-shore) 특구로 지정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해외 투자자에게 한국 내 여러 규제들로 국내 투자는 까다롭다. 인천에서 국제 기준에 맞춘 회사법, 세금 제도를 적용한다면 국내 자금 유·출입이 훨씬 자유로워지고 국내 투자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양도시이지만 원주민이 많지 않다는 특징도 유사한 지점이다. “인천은 부산 등 다른 항구도시와 달리 원주민이 다수가 아닙니다. 싱가포르도 비슷해요. 싱가포르는 원래 말레이시아의 하나의 주였고, 1965년 독립 이후 싱가포르 국민의 인종은 광저우, 푸지엔 출신 등 중국계가 70%이고, 말레이시아계 10%, 나머지 인도계 등으로 구성된 ‘다인종·다문화’ 국가입니다.”

원 대표는 “싱가포르는 인종 갈등과 차별을 줄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민자의 도시 인천도 이를 벤치마킹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학교에서부터 다른 문화를 가진 여러 인종이 어울리는 것을 권장하면서 매해 각자의 조상이 입었던 전통 의상을 입는 행사를 연다. 또 공공주택을 분양할 때도 마을에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등 여러 인종이 공존할 수 있도록 비율을 고려해 선발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원대로 대표에게 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중국 소설가이자 철학가인 루쉰이 했던 ‘청년들아 날 딛고 오르라’는 말처럼 저도 앞선 분들이 있었기 떄문에 조금 더 빨리 해외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중소기업, 스타트업 해외 진출의 시행착오는 ‘나 하나로 끝내자’는 마음으로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예비 창업가를 위한 교육도 계획 중이다. 정형화된 교육이 아니라 고등학교·대학교 중퇴자, 중년 재창업, 경력단절여성 등도 참여할 수 있는 교육이다. 그의 이름처럼 창업을 시작한 후배들이 뒤따를 수 있는 ‘큰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약력

1970년 인천 부평 출생

1983년 인천주안초등학교 졸업

1986년 상인천중학교 졸업

1989년 제물포고 졸업

1998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삼성물산 입사

2000년 KTB네트워크 입사

2006년 KTB네트워크 싱가포르 파견

2009년 KTB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장

2013년 현대투자증권 싱가포르 자산운영사 COO(최고운영책임자) 겸 CFO(최고재무관리자)

2016년 스타트업 ‘윌트 벤처 빌더’ 창업자 겸 대표




경인일보 포토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

백효은기자 기사모음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