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된후 7일만에 경복궁서
본가로 쫓겨난 비운의 신씨
중종 그리며 매일 인왕산 올라
71세에 폐비로 왕릉 아닌
양주 장흥 일영리 선산에 묻혀
부부인 신씨는 반정군이 몰려온 역사적 순간에도 차분하게 군사의 말머리를 살피며 기다렸다. 그러나 1506년 9월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중전 신씨는 왕비에서 폐서인으로 경복궁에서 궁 밖 본가로 쫓겨났다. 폐비가 된 신씨는 사랑하는 남편 중종을 그리며 매일같이 인왕산 바위에 올랐다.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 따라 거니는 중종을 향해 붉은 치마로 아침 문안 인사하였다. 하지만 공신들 등쌀에 힘없는 임금은 궁 밖 인왕산을 바라볼뿐 방법이 없었다. 조강지처를 버려야 살 수 있었다.
왕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왕비인 신씨를 버렸다. 왕과 왕비의 생이별이다. 슬픔에 젖은 폐비 신씨는 삼각산 넘어 아버지 신수근의 묘가 있는 양주로 갔다. 한양과 접경이고 이름처럼 '오래도록 길이 흥하다'는 장흥(長興)에 거창 신씨 세거지와 선산이 있었다. 이곳은 왕들이 자주 사냥을 나오는 곳으로 한양과 통하는 길목이었다. 폐비 신씨도 중종이 죽은 후 71세에 이곳에 묻힌다. 중종의 첫번째 왕비인 신씨는 중종이 있는 정릉(靖陵)으로 가지 못했다. 왕비가 아닌 폐비로, 왕릉이 아닌 묘로 양주 장흥 일영리 일영봉 선산에 묻혔다.
세상을 떠나고 182년 후 1739년 영조때 복위되었다. 시호는 단경왕후(端敬王后)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예로써 공경하고 의로써 조심하였던 그녀의 품성이 담긴 시호다. 능호는 온릉(溫陵)이다. 신주는 종묘에 모셨다. 애틋한 첫사랑은 죽어 따뜻한 온기로 달랬다. 추존된 왕릉이라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단출하다. 석호와 석양만 반긴다. 죽어서도 혼자지만 햇살은 따뜻하다. 양주 온릉은 홍살문·정자각·수복방·비각·봉분으로 산속에 혼자 있다. 한국전쟁 격전지로 한동안 군사시설 보호구역 안에 있다가 2019년 11월14일 개방되었다.
조선 왕릉 42기 중 양주에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 1호선 의정부 가능역과 3호선 구파발역에서 360번 타면 30분 거리다. 왕릉 중 유일하게 무료다. 아침 해가 솟을 때 양주 온릉에 가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비밀이 있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