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강화도 3·1운동 주역 ‘결사대장 유봉진’ 수기 발견

입력 2024-08-09 18:35 수정 2024-08-10 21:22

강화만세 기획 내용 담겨 새로운 역사 주목

서울서 조종환이 연락해 강화 인사들과 계획

비밀조직 ‘대동단’ 군인단장 유경근과도 연결

“대규모 강화 시위, 조직적 기획됐을 가능성”

유봉진 지사가 1955년 재경 강화학우회가 발행한 ‘내고향 제2호’에 기고한 수기 ‘3·1운동과 나’  사본 앞부분.  /유부열 제공

유봉진 지사가 1955년 재경 강화학우회가 발행한 ‘내고향 제2호’에 기고한 수기 ‘3·1운동과 나’ 사본 앞부분. /유부열 제공

1919년 3·1운동 당시 3월18일 인천 강화도의 ‘강화 만세 시위’는 누가 어떻게 기획해서 2만명 군중이 운집한 대규모 시위로 실행됐는지, 그 경위는 지금까지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다.

3월18일 강화 읍내 시장에서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두르고 말을 타며 만세 시위를 이끈 유봉진(1886~1956) 지사의 수기가 최근 발견됐다. 유봉진 수기에는 강화 만세 시위의 최초 기획이 서울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새로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단서’가 담겨 있는데, 이와 관련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데이터베이스’, ‘독립유공자 공훈록’, ‘인천광역시사’(2013년), ‘신편 강화사 증보’(2015년) 등 강화 만세 시위를 다룬 자료와 책마다 기획·실행 과정이나 날짜 등이 조금씩 다르다. 공통점은 당시 강화 지역의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며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만세 시위 때 선봉에 선 유봉진을 중심으로 서술됐다는 것이다. 강화 출신의 죽산 조봉암(1899~1959)은 자서전에서 청년기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마음을 먹게 된 계기로 유봉진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봉진에 대한 기록은 일제의 심문조서나 판결문 외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강화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있는 유부열 씨는 1955년 11월30일 재경 강화학우회가 발행한 잡지 ‘내 고향 제2호’(개인 소장)를 최근 발견했는데, 이 잡지에는 당시 서울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유봉진 지사가 기고한 ‘3·1운동과 나’라는 글이 수록됐다. 다음은 유봉진 글 앞부분의 일부다.

“어느날 경성에서 조종환 씨가 서울에서 연락을 받고 나와 황충진(황윤실), 황통문(황도문), 류희철(유희철) 등은 길상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강화읍의 하운혁(윤인혁)을 만나 대체 준비를 마치었다.”

기존 자료들은 유봉진이 1919년 3월 초 연희전문학교 학생 황도문(1896~1950)으로부터 경성의 3·1운동 소식을 접했다거나, 그 시기 3·1운동 소식이 강화 전역에 알려진 것이 유봉진이 강화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된 계기라고 썼다. 이러한 내용들은 주로 일제의 심문조서나 판결문을 토대로 쓰였다. 당시 강화가 섬이긴 했으나, 인구 7만여 명이나 사는 큰 지역이었고 황도문처럼 경성 유학생도 많았으므로 경성의 3·1운동 소식은 금방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유봉진 지사. /출처: ‘인천인물100인’

유봉진 지사. /출처: ‘인천인물100인’

대한제국 군대 강화진위대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유봉진이 경성의 소식만으로 거사를 계획했다고 하기엔 개연성이 떨어진다. 강화 만세 시위로 체포된 유봉진 등 주요 가담자들은 심문 과정에서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고, 비밀 유지와 동지 보호를 위해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유봉진의 수기를 발굴한 유부열 씨가 유봉진이 해방 이후 고백하듯 언급한 ‘조종환’(1890~1937)이란 인물에 주목한 이유다.

기존 여러 자료에 따르면, 강화 출신으로 서울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하고 전북 전주 신흥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조종환은 3월9일 길상면 온수리의 교회당에서 유봉진 등 강화 인사들이 비밀 회의를 열었을 때 “강화도에서만 있을 것이 아니다”라며 시위의 필요성을 역설한 인물이다. 기존 자료에서는 조종환의 귀향 시점이 명확하지 않았는데, 유봉진의 수기에서는 만세 시위의 최초 제안자로 ‘경성에 있는 조종환’을 지목했다는 것이다.

조종환은 누구인가. 3·1운동 직후 의친왕 해외 망명을 추진하고,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했던 비밀조직 ‘대동단’(大同團) 단원이었다. 대동단 군인단 총단장을 맡으며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하는 등 대동단의 주역이었던 송암 유경근(1877~1957)이 강화 출신이다. 조종환은 강화 만세 시위 이후인 1919년 6월께 유경근에게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낼 독립군 지원자를 소개했고, 실제로 8명을 해당 지역으로 보냈다. 하지만 지원자 중 ‘밀정’이 끼어 있어 유경근은 한 달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당시 일본 경찰은 유경근이 강화와 인연이 깊으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을 조직하고 있던 성재 이동휘(1873~1935)에게 지원자를 보냈다고 봤다.

강화 만세 시위는 조종환을 연결 고리로 유경근 혹은 대동단 등 경성 쪽이 기획·실행·지원에 관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경근은 강화도 출신이 운영했던 서울 종로 ‘조선여관’(2019년 11월14일자 1면 보도)을 아지트로 삼고 강화·김포 지역 독립운동가, 상하이 임시정부 관련 인사들과 접촉했다. 조선여관에는 강화 출신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많이 찾았는데, 강화 만세 시위의 주도자 중 한 명인 황도문도 연결된다.

유경근의 손자이기도 한 유부열 씨는 “강화 만세 시위는 조종환 등을 통해 서울의 어느 조직화된 쪽에서 기획했고, 강화 지역 각계 인사들이 이에 호응해 전국적으로도 큰 만세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유봉진 수기는 강화 3·1운동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새롭게 밝힐 수 있는 단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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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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