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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대책위 대변인·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정책기획국장
여전히 55번째(8월17일 기준) 6월24일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6월24일 리튬배터리 폭발사고로 무려 23명의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힘겹게 버티며 아직도 그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지난 13일 광화문 광장 정부서울청사 앞의 한낮 체감온도는 46도였다. 유가족들은 고용노동부가 2주에 걸쳐 많은 인원을 투입해 가해 기업인 아리셀에 대해 진행한 특별근로감독의 결과를 발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광장에 섰다. 하지만 폭염보다 유가족을 더 힘들고 열받게 한 것은 들으나 마나 한 고용노동부의 브리핑 내용이었다. 참사 초기 언론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 외에 그 무엇도 더해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23명의 노동자를 숨지게 한 회사 대표는 구속은 고사하고 거리를 활보하며 대형 법무법인을 선임해 자기 책임 회피에 여념이 없다. 과연 인간의 행동인가 싶을 정도의 범법과 차별행위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누구나 알고 있는 형식적인 수사와 결과가 아니라,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가장 먼저 진행했어야 하는 박순관 대표의 구속수사를 요구하는 희생자 가족의 절절함에 귀 기울이고 이에 대한 답을 내놨어야 한다.

그리고 사용자와 정부의 책임과 역할이라는 '주어'가 빠진 재발 방지 대책,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책임을 미루는 대책으로 유사한 중대재해 참사가 재발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도대체 정부는 이번 참사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의문이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재차 확인하는 것은 지난 시기 우리 사회가 겪은 사회적 참사의 원인을 밝혀내고, 책임이 있는 사람과 기관에 대해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는 것이 여전히 피해당사자와 시민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번 아리셀 참사에도 마땅히 주체로 나서야 하는 정부의 역할은 사라지고 지칠 대로 지친 피해당사자와 보편적 상식을 갖고 있는 시민들의 몫만이 남았다.

피해자 가족 너머 사회 곳곳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은 오로지 절망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우주의 소중함은 이제 어지간한 규모의 참사가 아니면 언론과 시민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인권, 생명, 안전, 노동의 가치는 이윤, 경쟁, 효율 등으로 바뀐 지 오래다. 긴 시간 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로 확인하고 만든 보편적 상식과 사회적 가치는 다시 관념과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닌지 회의와 자괴감마저 든다. 이 절망의 자리에 다시 '희망'을 새겨야 한다.

화성시에 맞서 유가족들이 느끼던 고립감은 상당했다. 주로 돈과 엮인 '가짜뉴스'에 어쩔 줄 몰라했고, 문화적 차이의 벽 앞에서 좌절했다. 그러나 이들은 시민들의 힘을 믿는다. 화성시와 경기도의 일방행정 속에서 절망하던 유가족들은 폭우를 뚫고 거행된 행진과 49재를 통해 "전국에서 아리셀 참사에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시민들이 많음을 확인하며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절망을 벗어나 당당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유족들에게 확인시켜주자. 그보다 기업과 친기업 정부의 이익과 정치적 계산보다 인간의 생명이 더 소중하고 존엄함을 우리 스스로 확인할 때다.

그 출발지로 8월17일 화성을 향하는 '아리셀 희망버스'를 제안한다. 2011년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진숙을 살리기 위해 첫 번째 시동을 건 '희망버스'. 지난 13년간 '희망버스'는 약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노동자, 시민 주도의 사회적 쟁점을 키웠고, 연대와 단결을 통해 이를 해결하는 역할을 다해왔다. 스물네 번째 희망버스의 종착지가 화성이다.

아리셀 참사가 55일째 되는 날 전국에서 상징적으로 55대의 희망버스가 화성으로 출발한다. 저 멀리 제주에서 출발하는 시민이 있고 거제와 창원, 순천과 광주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모이고 모여 55대의 희망버스가 준비됐다. 인천도, 경기지역 곳곳에서도 31개 희망버스가 준비됐다.

하루하루 절망 속에 흘리던 눈물이 내가 되고 강이 된 오늘, 새로운 '희망'을 심고 전파하는 내일로 옮겨가자. 8월17일 희망버스에 함께 오르자. 경기도와 인천지역 노동자,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주기 바란다.

/한상진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대책위 대변인·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정책기획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