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전쟁물자 운송 '송탄유' 제조
송진 채취 위해 참혹한 흉터 남겨
피해목들 70~90년 말없는 시위뿐
할수 있는건 오로지 자리 지키는것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수 있는게 뭘까


소나무
충북 제천 주론산 일대에 송진 채취로 피해를 입은 소나무. /전진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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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삼 건축평론가·'와이드AR' 발행인
올 여름 기록적인 폭염과 열대야를 통해 펄펄 끓고 있는 지구촌 뉴스가 우리의 현실임을 확인한다. 땡볕 더위에도 한 자리를 고수하며 끓는 대지를 식혀주고 있는 나무와 숲의 존재에 고마움이 커진다. 기후변화의 무쌍함을 오롯이 제자리를 지키며 이겨내고 있는 나무들에게서 위대함의 실체를 발견한다.

지난 봄 집사람과 함께 제천 주론산 둘레길로 원정 맨발걷기를 다녀왔다. 산은 신록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이었고, 산길은 맨발 딛기에 좋을 만큼 낙엽들이 쌓여 있었으며 작은 골엔 발을 담그면 시릴 정도의 개울물이 흘러내렸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땅의 기운에 흠뻑 젖어들 무렵 우리부부의 눈을 사로잡은 소나무들이 있었다.

기괴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형상의 소나무들은 밑둥 부근이 심하게 왜곡된 채 아물어진 상태를 보였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전쟁 물자 운송을 위한 송탄유(松炭油, 송진을 끓여서 생산한 기름)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 전역의 소나무에서 마구잡이로 송진을 수탈하는 만행을 저지른 현장이다. 송진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소나무 밑둥에 날카로운 톱날로 V자 모양의 상처를 내고 그 자리에 철판을 끼워 넣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입은 상처가 아물며 생긴 참혹한 흉터였다.

기록에 의하면 일제가 1930년대 시작한 송진 채취는 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이어졌고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후 일본은 남은 송탄유를 어선의 연료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국립산림과학원 자료에 따르면 인천 강화도 보문사, 전북 남원 왈길마을, 경남 합천 해인사, 울산 울주군 석남사, 강원 평창 남산 등 다섯 곳에 피해목이 생육 중이며 강원 홍천군 수타사, 충남 홍성 결성 석당산, 충북 제천 주론산 등 전국의 21개소에 피해목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 상태라고 한다.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온다. 전국적으로 송진 채취 피해목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를 이겨내고 기형적으로 자라난 소나무들이 오랜 후유증과 불안정한 생육 상태로 말미암아 고사되거나 쓰러지고 있음이다.

8월이면 광복의 기쁨과 동시에 우리 산하가 일제에 의해 온갖 핍박과 착취, 수탈의 고역으로 몸살을 앓던 시공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면 사람들 저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애국심으로 고조된 사회 분위기는 이삼일을 넘기는 게 쉽지 않다. 여름철 폭염 탓인가? 쉬이 말라버린다.

그런데 말이다. 전국의 송진 채취 피해목들은 짧게는 70년, 길게는 90년 이상을 한 자리에서 묵언 시위를 할 뿐이다. 상처 입은 소나무들은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이란 수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오롯이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그것이 소나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言)이다. 이 나무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보다 더 오랜 세월 이 산하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전진삼 건축평론가·'와이드AR'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