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나름의 '어른론' 있겠지만
독립성·경제력 두개 조건 갖춰야
돈 버는 일의 보조처럼 여긴 살림
당연하게 노동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의 폭 넓어져야 어른의 기본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기준들을 적용할 테고 나름의 '어른론'이 있을 것이다. 가장 흔하게 들어본 말은 "아이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어른은 해야 하는 것을 한다"라는 말이다. 아이일 때는 욕망에 충실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철이 들어서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을 먼저 하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아이들을 책임감 있게 키우고 싶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말일 테다. 사회에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애, 어른을 가리지 않지만 대체로 어른들이므로 어른들이 욕망에 충실하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다.
조금 웃음을 보탠 말로 "요거트의 뚜껑을 핥지 않는 것이 어른이다"라는 말도 있다. 체면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어릴 적엔 한 입을 아쉬워하던 맛있는 음식, 혹은 좋아하는 음식을 간섭 없이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것이 어른이라는 이야기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조건이 같이 걸려있는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독립성, 그리고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다는 경제력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결부되어 있다. 결국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성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경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녀에게 부모가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드는 "정치적 독립은 경제적 독립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버는 돈으로 밥을 먹고 내 집에서 잠을 자면서 내 말은 안 듣겠다니 그러려면 네가 돈을 벌고 네가 집을 사서 독립하거라, 이런 말이다. 자식 입장에서야 계산적으로 들리겠지마는 자식이 부모의 그늘서 벗어나 어엿한 어른으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으로 선해할 수도 있다.(사실은 좀 괘씸해서 하는 말일 테지만)
그럼 결론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 어른이라는 말일까? 돈을 번다고 모두 독립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은 바꿔 말해서 독립을 한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직접 먹을 것을 조리해 먹고 설거지하고 자기 옷을 빨아 널고 말리고 개켜서 다시 입고, 자기가 사는 집의 비용과 월세를 스스로 돈을 벌어 감당하는 것이 어른이다. 하지만 돈만 벌기에도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노동에 지쳐 집에 돌아와 입었던 옷을 세탁하고 장을 봐오고, 그걸로 직접 요리해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면 이미 밤 12시를 넘겼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혼자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인간은 분업을 고안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혹은 동거라는 합의를 통해 누군가는 돈을 벌어오고 누군가는 나머지의 모든 것을 담당한다. 빨래를 하고 널고 말리고 개키고 식재료를 사다가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살고 있는 집을 청소한다. 하지만 이 분업이자 동업은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조될 수밖에 없는 돈, 그리고 돈을 버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나머지 중요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돈을 버는 중요한 일에 대한 보조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돈을 버는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게 잘 뒷받침해주는 일, 그게 오늘날의 살림, 집안일의 위상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일의 성격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쳐 종속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바깥일과 집안일이라는 구분과 위계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다시 돌아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릴 적 부모에게서 받았던 돌봄의 감각, 그리고 성장하여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그 돌봄 감각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의식주에 대해 완전히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수준의 독립은 아닐지라도 돌봄 받는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쉽게 비용을 지불하고 외주 맡기지 않고 스스로 그 일들을 하나씩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하나의 주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의 노동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삶의(살림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수행해보는 것, 그리하여 그 과정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내가 그 모든 것을 해낼 수 없을 때에 비로소 얻게 되는 그 일에 대한 존중, 그것이 어른이 되는 길의 기본 아닐까.
/이원석 시인
독립성·경제력 두개 조건 갖춰야
돈 버는 일의 보조처럼 여긴 살림
당연하게 노동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의 폭 넓어져야 어른의 기본
이원석 시인 |
조금 웃음을 보탠 말로 "요거트의 뚜껑을 핥지 않는 것이 어른이다"라는 말도 있다. 체면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어릴 적엔 한 입을 아쉬워하던 맛있는 음식, 혹은 좋아하는 음식을 간섭 없이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것이 어른이라는 이야기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조건이 같이 걸려있는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독립성, 그리고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다는 경제력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결부되어 있다. 결국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성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경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녀에게 부모가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드는 "정치적 독립은 경제적 독립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버는 돈으로 밥을 먹고 내 집에서 잠을 자면서 내 말은 안 듣겠다니 그러려면 네가 돈을 벌고 네가 집을 사서 독립하거라, 이런 말이다. 자식 입장에서야 계산적으로 들리겠지마는 자식이 부모의 그늘서 벗어나 어엿한 어른으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으로 선해할 수도 있다.(사실은 좀 괘씸해서 하는 말일 테지만)
그럼 결론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 어른이라는 말일까? 돈을 번다고 모두 독립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은 바꿔 말해서 독립을 한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직접 먹을 것을 조리해 먹고 설거지하고 자기 옷을 빨아 널고 말리고 개켜서 다시 입고, 자기가 사는 집의 비용과 월세를 스스로 돈을 벌어 감당하는 것이 어른이다. 하지만 돈만 벌기에도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노동에 지쳐 집에 돌아와 입었던 옷을 세탁하고 장을 봐오고, 그걸로 직접 요리해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면 이미 밤 12시를 넘겼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혼자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인간은 분업을 고안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혹은 동거라는 합의를 통해 누군가는 돈을 벌어오고 누군가는 나머지의 모든 것을 담당한다. 빨래를 하고 널고 말리고 개키고 식재료를 사다가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살고 있는 집을 청소한다. 하지만 이 분업이자 동업은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조될 수밖에 없는 돈, 그리고 돈을 버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나머지 중요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돈을 버는 중요한 일에 대한 보조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돈을 버는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게 잘 뒷받침해주는 일, 그게 오늘날의 살림, 집안일의 위상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일의 성격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쳐 종속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바깥일과 집안일이라는 구분과 위계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다시 돌아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릴 적 부모에게서 받았던 돌봄의 감각, 그리고 성장하여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그 돌봄 감각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의식주에 대해 완전히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수준의 독립은 아닐지라도 돌봄 받는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쉽게 비용을 지불하고 외주 맡기지 않고 스스로 그 일들을 하나씩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하나의 주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의 노동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삶의(살림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수행해보는 것, 그리하여 그 과정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내가 그 모든 것을 해낼 수 없을 때에 비로소 얻게 되는 그 일에 대한 존중, 그것이 어른이 되는 길의 기본 아닐까.
/이원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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