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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프롬인천·(34)] ‘마음’에 물어봤다 “유태준 대표에 대해 알려줘”

입력 2024-09-04 16:20 수정 2024-09-04 18:23

‘마음AI’ 대표이사… 신흥동 출신

좁은 골목 사이 일본식 집·창고 여럿

엄마 손 잡고 처녀목욕탕 갔던 기억

집, 학교, 교회만 오가던 유년 시절

1984년 서울대 입학땐 민주화 한창

20년 다닌 삼일 퇴직 후 마인즈랩 창업

인공지능 시스템 구축 업무까지 확장

“인천, 인공지능 통해 첨단도시 되길”

인공지능(AI) 기업 마음AI를 이끌고 있는 인천 신흥동 출신 유태준 대표이사.

인공지능(AI) 기업 마음AI를 이끌고 있는 인천 신흥동 출신 유태준 대표이사.

아임프롬인천 이번 손님은 인공지능(AI) 기업 마음AI를 이끌고 있는 인천 신흥동 출신 유태준 대표이사다. 유 대표를 ‘아임프롬인천’에 초대한 이유를 먼저 설명해야겠다. 우선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수많은 선인고 동문들의 요청과 추천이 있었다. 또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AI 기업의 리더를 직접 만나보고 싶은 개인적인 호기심도 크게 작용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호기심이 발동했다. 마음AI 홈페이지에 가면 ‘마음챗봇’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챗봇이 과연 회사 대표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지 궁금해 직접 질문을 던져봤다.

▶질문(나) : “유태준 ‘마음AI’ 대표이사에 대해 설명해줘”
▶답변(마음챗봇) : “유태준 마음AI 대표는 마음에이아이의 설립자이자 CEO입니다. 마음에이아이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의료, 교육,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입니다. 유태준 대표는 인공지능 분야의 선구자로,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적용에 기여하고 있습니다.…(중략)…유태준 대표는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인공지능 기술의 윤리적 사용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공지능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다양한 기관과 협력하여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적용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답변을 얻고 적잖이 놀라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직접 듣고 전하는 이야기만큼은 생생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 대표와의 세 시간 남짓한 대화를 나눴다. 이번 ‘아임프롬인천’은 챗봇이 결코 전하지 못하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노력했다.

최근 그를 만나기 위해 최근 판교IT센터에 위치한 마음AI 사옥으로 향했다. 사옥은 규모가 컸는데 판교IT센터 1개층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트인 공간에 마련된 미술작품 갤러리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어도 좋을 직원 휴게공간, AI로봇 탕비실 등도 인상적이었다. 퍽 넓은 공간을 마음AI가 현재 구현하고 있는 모든 서비스를 보여주는 용도로 할애하고 있었다. 그때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읽기라도 했던 것인지 유 대표는 기자를 직접 데리고 다니며 AI가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를 시연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금세 로봇이 커피를 내리고 AI로봇이 갤러리에서 도슨트 역할을 하며 콜센터 상담원처럼 전화 상담을 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마치 AI가 널리 보급된 미래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 대표는 이 모든 것이 시작일 뿐, 겨우 이 정도로 놀라서야 되겠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조만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더 놀라운 서비스를 선보일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과연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성장기를 보낸 이가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첨단 인공지능 기업의 수장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1965년 중구 용동에서 출생한 유 대표는 성장기 대부분을 인천 신흥동에서 보냈다. 그가 간직한 어릴 적 신흥동에 대한 기억은 아주 좁은 골목, 일본식 집과 창고, 그곳을 함께 뛰놀던 동네 친구와 형·동생들로 요약할 수 있다.

유태준 대표는 이 모든 것이 시작일 뿐, 겨우 이 정도로 놀라서야 되겠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조만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더 놀라운 서비스를 선보일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유태준 대표는 이 모든 것이 시작일 뿐, 겨우 이 정도로 놀라서야 되겠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조만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더 놀라운 서비스를 선보일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일본식 건물이 많았죠. 낙후된 동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가끔 가다가 초가집도 있었고요. 지금은 ‘빌라’로 바뀐 곳도 많고요. 비슷한 또래들과 골목길에서 뛰어놀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건 집 앞에 바로 보이던 목욕탕 굴뚝입니다. ‘처녀목욕탕’은 유명한 동네의 명물이었는데 지금은 운영을 하고 있지 않아요. 특별할 것 없는 흔한 이야기지만 엄마 손에 이끌려 여탕에 입장했다 또래 여자친구를 만났던 기억도 있어요. 그 뒤론 절대로 엄마를 따라가지 않고 아빠와 다녔지요.(웃음)”

꼭 가보지 않아도 인천 사람이라면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목욕탕 이름이다. 유 대표가 동네 명물이라고 소개한 처녀목욕탕은 그 흔적이 비교적 고스란히 남아있다. 연기가 피어오르지는 않지만 처녀목욕탕이라고 쓰인 하얀색 글씨가 선명한 빨간 벽돌 굴뚝은 지금도 홀로 남아 수십 년 전과 꼭 같이 동네를 지켜보고 있다. 운이 좋게도 최근 무작정 찾아간 신흥동에서 만난 송상일·유귀덕씨 부부에게서 처녀목욕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녀목욕탕이라고 쓰인 하얀색 글씨가 선명한 빨간 벽돌 굴뚝은 지금도 홀로 남아 수십 년 전과 꼭 같이 동네를 지켜보고 있다.

처녀목욕탕이라고 쓰인 하얀색 글씨가 선명한 빨간 벽돌 굴뚝은 지금도 홀로 남아 수십 년 전과 꼭 같이 동네를 지켜보고 있다.

송상일씨는 1961년 목욕탕을 인수해 2000년대 초반까지 운영한 송호석(1925~2002)·공대열(1927~2000)씨 부부의 아들이다. 송상일씨 내외는 현재 옛 목욕탕 건물 2층에 거주하고 있다. 목욕탕 건물 1층에서는 지금 삼겹살 전문 식당이 영업 중이다. 송씨는 “목욕탕이 일제 강점기부터 영업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처녀목욕탕이 영업을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대로 전해진다. 대중목욕탕은 한국에는 없던 문화였다. 유교적 관습이 강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옷을 벗고 몸을 씻는 목욕을 즐기지 않았다. 치료 목적의 온천욕은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남의 눈을 피해 냇물에 몸을 담그는 정도가 그나마 유사한 정도였다. 2019년 도시역사관은 ‘동네 목욕탕―목욕합니다’라는 제목의 특별기획 전시를 진행했다. 당시 전시자료를 보면 일본인의 조선 이주와 함께 대중탕이 도입됐다. 물이 부족해 집마다 개인 욕실을 둘 수 없는 일본에는 대중탕 문화가 있었는데, 물이 부족하지 않은 조선에서도 일본인을 위한 대중탕이 유망 사업으로 이어졌다. 대중탕은 탕옥(湯屋), 욕장(浴場), 욕탕(浴湯), 목욕간(沐浴間) 등의 용어로 불렸다.

일제는 조선인은 불결한 민족인데, 목욕으로 문명인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선전했다. 처녀목욕탕 내부를 표현한 미니어쳐.

일제는 조선인은 불결한 민족인데, 목욕으로 문명인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선전했다. 처녀목욕탕 내부를 표현한 미니어쳐.

일제는 조선인은 불결한 민족인데, 목욕으로 문명인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선전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도 관습을 깨고 목욕탕에 알몸을 담그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말을 하거나 조선 옷을 입은 손님은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일제는 조선인만 이용할 수 있는 공설욕장을 만들며 ‘불결한’ 조선인과 거리를 두었다. 인천부는 화수동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는 공설목욕탕을 개설했다. ‘조선인의 목욕문화를 개선시켜 공중위생 촉진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처녀목욕탕은 이후 문을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욕탕 이름에 왜 ‘처녀’가 들어갔는지 정확한 내력은 알기 힘들다. 인근에 정미공장 여공들이 주로 이용해서라는 이유도 있고 인천에서 처음 생겨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일본인 주인이 운영하던 목욕탕은 해방과 함께 문을 닫거나 시영 목욕탕으로 운영됐고 더러는 개인에게 매각돼 다시 손님을 받았다. 처녀목욕탕 또한 1960년 이전까지 한동안 폐허처럼 남아있었다고 송상일씨는 전했다. 처녀목욕탕이었지만 남탕도 있었다. 1층 입구를 계산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남탕과 여탕이 나뉘었다. 2층은 가족 혹은 연인을 위한 ‘독탕’으로 한동안 운영됐다.

처녀목욕탕은 지역 프로야구 구단인 삼미슈퍼스타즈 선수들이 단체로 이용했을 정도로 지역에서 유명했다.

처녀목욕탕은 지역 프로야구 구단인 삼미슈퍼스타즈 선수들이 단체로 이용했을 정도로 지역에서 유명했다.

처녀목욕탕은 지역 프로야구 구단인 삼미슈퍼스타즈 선수들이 단체로 이용했을 정도로 지역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송씨는 “야구 경기가 끝나면 저녁 늦게 야구팀이 찾아오곤 했다. 야구팀이 인원이 많아 남탕으로는 비좁아 여탕을 없애고 남자 손님만 받아야 했다”고 했다. 삼미슈퍼스타즈 선수들은 처녀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면 길 건너편 고깃집 신생갈비에서 갈비탕을 먹고 떠났다고 한다. 삼미슈퍼스타즈가 청보핀토스로 구단 명칭이 바꾼 뒤로는 선수들이 이곳 목욕탕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처녀목욕탕은 2000년대 초 대형 사우나와 찜질방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문을 닫았다. 1967년 31개였던 인천지역 목욕탕은 1971년에는 64개로 두 배 이상 늘었고 1990년에 들어서는 342개에 이른다. 가장 목욕탕이 많았던 시기는 2002년으로 503개 목욕탕이 영업했다. 현재는 204곳이 남아있다. 목욕탕집 며느리 유귀덕씨는 어린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목욕탕을 찾았던 이웃집 아들 유 대표를 기억하고 있었다. 유 시는 “부자가 목욕탕을 자주 찾았다”면서 “(유 대표 부친이) 옥상에 빨래를 직접 널던 모습을 자주 보았는데, 매우 가정적인 아버지였다”고 기억했다.

유 대표는 전라도 출신 1935년 출생 유성원씨와 같은 전라도 출신 이봉순씨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태준 제공

유 대표는 전라도 출신 1935년 출생 유성원씨와 같은 전라도 출신 이봉순씨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태준 제공

유 대표는 전라도 출신 1935년 출생 유성원씨와 같은 전라도 출신 이봉순씨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20여년 전 작고했고, 어머님은 지금도 생존해 계신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타지인 인천에서 만나 가정을 꾸렸다. 유 대표 부친은 타국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은 베트남이었고,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 가족과 떨어진 타국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버님은 대한통운에서 평생을 보내셨어요. 리비아에는 두 차례나 가셔야 했어요. 두 번째 리비아에 가실 때는 퇴직을 몇 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리비아에 가지 않으면 퇴직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위해 또 떠나셨죠. 공항 출국장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님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유 대표 부친은 타국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은 베트남이었고,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 가족과 떨어진 타국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유태준 제공

유 대표 부친은 타국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은 베트남이었고,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 가족과 떨어진 타국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유태준 제공

유 대표의 부친이 오래도록 재직한 대한통운은 인천과의 인연이 남다른 기업이다. 대한통운 80년사를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물류기업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대한통운의 역사는 인천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대한통운의 전신은 한국미곡창고주식회사(한국미창)이며, 한국미창은 일제강점기 설립된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조선미창)이 해방 이후 이름을 바꾼 회사다. 우리나라 최고의 물류기업이 쌀을 보관하는 창고회사에서 출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1차세계대전 무렵 조선과 일본에서는 쌀 폭동이 벌어진다. 쌀 값이 폭등한 것이 폭동의 주요 원인이었다. 쌀은 20세기초 동북아 지역 최대 생산품인 동시에 최우선 순위 식량자원이었다.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중요한 자원이 쌀이었다. 쌀 폭동 진정 이후 일제는 산미증식 계획을 수립하고 대대적인 미곡 증산 정책을 추진한다. 일본과 조선에서 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려 가격을 안정시키고 식량난을 해소하는 것이 뼈대다. 품종 개량, 수리사업 추진 등으로 성과를 올렸다.

/유태준 제공

/유태준 제공

이후 증산된 조선의 쌀이 일본에 대량 수출되며 또 문제가 불거진다. 일본과 조선에서 모두 생산이 늘었는데, 조선미가 일본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쌀값이 큰 폭으로 떨어져 일본 농민 단체의 반발이 거세졌다. 조선의 수출미를 차질없이 보관하고 조절하려면 창고가 대거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조선미곡창고계획이었고 쌀 보관과 창고 건설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회사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였다. 일제 입장에서는 조선의 쌀을 일본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회사의 취지였고, 조선 입장에서 보자면 조선의 쌀을 체계적·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회사는 일본 정부 주도로 서울에 설립됐는데, 인천에 가장 먼저 지점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 1930년 군소 운수업체를 통합한 조선운송주식회사(조운)가 설립된다. 조운은 1943년 조선해륙운수, 1947년 조선운수를 거쳐 1958년 한국운수로 이름을 바꾼다. 이후 1961년 미창이 한국운수를 흡수 통합하고 1963년 대한통운으로 사명이 바뀐다. 대한통운은 이후 대기업으로 성장해가기 시작한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천아트플랫폼의 C동은 ‘대한통운’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어졌는데, 창고 건물 외벽에 대한통운 로고는 지금도 볼 수 있다.

유 대표는 어린 시절 운동을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다. 신흥초 재학시절 육상부로도 활동했다. /유태준 제공

유 대표는 어린 시절 운동을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다. 신흥초 재학시절 육상부로도 활동했다. /유태준 제공

유 대표의 부친은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에서 일했는데, 이는 대한통운의 해외 진출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966년 대한통운은 경남기업과 함께 ‘대한통운경남기업’을 설립하고 베트남의 군수물자 하역사업에 진출했다. 197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청이 발주한 카디마항의 항만 하역 및 관리 운영 프로젝트를 수주했고 1983년에는 동아건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주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서 대한통운이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거대한 송수관을 공장에서 매설 현장까지 옮겨주는 일이 아니라 흐름 전체를 관장하고 조절하면서 궁극적으로 전체 공사 시공 일정에 어떠한 차질도 발생하지 않게 보장하는 것이었다.

유 대표의 어릴 적 가정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월세방을 옮겨 다녔다. 아버님이 중동에서 일해 보내온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유 대표가 중학생이 될 무렵 어머님은 신흥동에 2층으로 아주 튼튼하게 집을 지으셨다. 지금도 그 집에서 유 대표 모친이 거주하고 있다. 유 대표는 “사글세를 전전하다 우리 집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여동생 다섯 식구의 꿈 같은 보금자리였다”고 했다.

아임프롬인천 유태준

아임프롬인천 유태준

유 대표는 어린 시절 운동을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다. 신흥초 재학시절 육상부로도 활동했다. 체육 시간에 뛰는 모습을 지켜보던 코치가 그를 육상부로 발탁했다. 6개월 정도에는 기본적인 훈련을 받고 어떤 종목에 주력할지 테스트를 받았는데, 코치는 높이뛰기가 맞겠다고 추천했다. 학교 대표로 지역 대회에 출전했지만, 아쉽게도 상을 받지 못했다. 유 대표의 모친은 나중에 학교를 찾아가 “태준이는 운동이 아닌 공부를 해야 한다”며 육상부를 그만두게 했다. 당시 같은 육상부로 활동했던 친구 가운데에는 이영숙이라는 친구가 유명했다고 그는 전했다.

유 대표의 동창인 이영숙은 우리나라에서 ‘육상 대모’로 불린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스프린터다.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간 여자 100m 종목의 한국신기록을 7차례나 갈아치울 정도로 한국 육상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가 1994년 6월 제48회 전국육상선수권 대회 여자 100m 결선과 같은 해 9월 후쿠오카 국제슈퍼육상경기대회에서 세운 11초49라는 한국 기록은 30년이 지나도록 깨지지 않고 있다. 이영숙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100m종목에서 동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여자100m종목에서는 이영숙이 대한민국의 마지막 메달리스트다. 이영숙은 2004년부터 안산시청 육상부 감독을 맡아 현재까지 이끌며 자신의 기록을 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유 대표는 공부를 참 잘했다. 유 대표는 “집, 학교, 교회 밖에 모르는 모범생이었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중학생이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연합고사’에서 인천 2등을 차지했을 정도다. ‘뺑뺑이’로 선인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당시선인고는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선인고가 ‘깡패학교’로 유명했어요. 어머니는 선인고 배정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우셨어요. 어머니의 표현으로는 두루마리 휴지 두 통을 쓰도록 계속 우셨다고 해요.”

공부를 잘했던 유태준은 고교 3학년이 되어서야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당구장에 드나드는 등 ‘일탈’의 재미에 빠졌다. 독보적인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성적이 나빠졌고, 결국 학력고사 점수가 좋지 않아 점수에 맞춰 관심도 없던 서울대 철학계열로 진학했고, 2학년에 미학과로 전공을 택했다. 그는 “미학과에 특별한 애정이나 열정은 없었다”고 했다.

그가 입학한 해의 서울대학교 교정은 민주화 요구로 학생운동이 격렬한 모습이었다. /유태준 제공

그가 입학한 해의 서울대학교 교정은 민주화 요구로 학생운동이 격렬한 모습이었다. /유태준 제공

그는 “1984년 입학한 학교는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가득한 전쟁터였다”고 했다. 민주화 요구로 학생운동이 격렬하던 시대였다. 학과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고, 칸트·헤겔 등 철학 서적 대신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운동권 써클’ 활동이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당시를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을 읽고 토론했던 시기였다”며 “이 때의 경험이 직장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1987년 6·10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열사가 같은 서울대 인문대 84학번이었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선배에게 이끌려 1년간 공장에 취직해 조합활동과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다. ‘후지카 곤로’로 유명한 후지카 인천 공장이었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현장 노동자와 독서토론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소련이 붕괴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산주의의 몰락을 목도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활동하던 정치조직도 모두 검거돼 와해됐다. “현장에서 보낸 3년이라는 시간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생각과 3년의 시간을 어떻게 되돌려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어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고시’였어요.”

사법시험, 행정고시, 공인회계사 시험 세 가지를 두고 고민하다 공인회계사 시험이 적성에 딱 맞아 보였다. “철학책과 달리 너무나 재미가 있었어요. 난생 처음 열어본 회계원리 책의 맨 앞부분의 ‘차변과 대변은 항상 정확히 일치한다’는 대차평균의 원리에 매료됐습니다.”

남들보다 뒤늦게 취업을 준비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아버님도 퇴직 이후 벌이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집안에 아픈 사람도 생겼다. 하루 20시간을 공부에 쏟아부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길어야 1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만약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막노동이라도 해서 집안에 경제적 보탬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공인회계사 시험은 보통 합격까지 2~3년 걸리는데, 회계학 책을 처음 사서 열어본 날부터 1·2차 시험을 모두 8개월 만에 통과했죠.”

남들보다 뒤늦게 취업을 준비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아버님도 퇴직 이후 벌이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집안에 아픈 사람도 생겼다. 하루 20시간을 공부에 쏟아부었다.

남들보다 뒤늦게 취업을 준비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아버님도 퇴직 이후 벌이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집안에 아픈 사람도 생겼다. 하루 20시간을 공부에 쏟아부었다.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 후에 우리나라 최고로 꼽히는 삼일회계법인에 입사했다. 면접날이 결혼식 날이어서 면접관들이 기분 좋게 합격을 시켜줬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첫 2년은 감사부서에서 일했다. 당시 삼일회계법인은 컨설팅 사업본부를 새롭게 시작했다. 당시 삼일의 서태식 회장 지시에 따라 8명으로 구성된 컨설팅본부의 창단 멤버가 됐다. 당시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들은 전사적자원관리(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주로 대기업을 대상으로 구축 업무를 도왔다. 삼성전자, SKC, CJ제일제당, 대우, 삼성화재 등 다양한 기업의 업무 프로세스 혁신과 ERP 시스템 구축 컨설팅을 직접 진행했다. 오랜 시간 ERP 컨설팅을 하면서 ‘빅데이터’ 분야에 관심이 생겼다. ERP 쌓인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해 의미 있는 결과물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20년을 다닌 삼일을 퇴직하고 빅데이터 툴을 개발하는 ‘마인즈랩’을 세웠다. 마인즈랩은 인공지능 영역으로 확장했다. 마인즈랩은 사명을 마음AI로 바꿨다. 현재 회사인 마음 AI는 대기업 공공기관, 중소기업에 인공지능(AI) 시스템을 구축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유 대표는 삼일에 있으면서 고향 ‘인천’ 덕을 톡톡히 봤다고 했다.

유 대표는 삼일에 있으면서 고향 ‘인천’ 덕을 톡톡히 봤다고 했다.

유 대표는 삼일에 있으면서 고향 ‘인천’ 덕을 톡톡히 봤다고 했다.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을 역임한 김영식 삼일회계법인 전 대표이사가 20년 동안 그의 ‘보스’였다. 김영식 전 대표이사는 제물포고 출신으로 신흥초 선배였다. 유 대표는 고향 인천이 자신의 ‘뿌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천이요? 더 큰 세상을 만나게 해준 고맙기 짝이 없는 내 고향 인천은 유태준의 뿌리입니다. 인천에서 태어났고 유아기 소년기를 신흥동 골목에서 지냈고, 신흥초, 대헌중, 선인고 등 초중고를 모두 인천에서 다닌 뼛속까지 인천 사람이죠. 저의 유년기, 청소년기 자아를 만들어준 도시죠.”

신도심과 구도심 격차가 심각한 고향 인천을 볼 때마다 그는 불편한 마음이 든다. 그는 인공지능 기술이 인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첨단산업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인천은 전통적으로 제조업이 강했던 도시입니다. 이러한 도시 기반과 인공지능 기술이 결합한 다양한 디바이스들, 예컨대 모바일 로봇, 자율주행 자동차 등을 생산해내는 첨단도시로 변모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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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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