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조금은 특별한 선택지가 있습니다. 넉넉한 한가위 연휴에 맞춰 닻을 올린 경인일보 ‘구간탐색(舊刊探索)’입니다. 여기서만큼은 최신작·흥행작을 다루지 않습니다. 잊혔거나 혹은 우리가 모르고 있던, 그러니깐 시의성 없는 작품들을 조명하죠.
운이 좋다면 이중 하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겠네요. 좌우지간 이런 모험적인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시간을 기꺼이 허비할 수도 있는, 그런 용기 있는 독자야말로 우리의 ‘동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 편은 올해 8월 경인일보에 입사한 새내기, 수습기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각각 연대의 가치와 치열한 사투를 그린 영화·드라마를 추천하는가 하면,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아주 오래된 단막극도 끄집어냅니다.
작품을 보고서 떠오른 생각을 알려줄 이메일(pi@kyeongin.com) 피드백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말하자면 ‘온라인 엽서’이겠죠. ‘수원시 팔달구 효원로 299, 4층 편집국 문화체육부’로 보내올 손편지도 좋습니다. 이따금 이곳으로 온 독자들의 의견도 소개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인일보 기자 개개인의 취향이 듬뿍 담긴 작품들을 살펴볼 누군가에게 미리 전합니다. “그래서 ‘실패할 확률’의 맛은 어떻던가요?” /편집자주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OTT 웨이브┃마주영 사회부 수습기자
#조금은 특별한 연대
우리 모두에게는 부족한 모습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입니다. 서툴거나, 방황하거나, 포기하거나…. 부족함이 만들어낸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를 일으키는 건 역설적이게도 나와 같은 또 다른 ‘부족한 사람’입니다.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이런 연대의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그 충격 여파로 직장까지 잃은 ‘팻’은 조울증 진단을 받고 8개월간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는 아내와 재결합할 완벽한 계획을 세우지만, 퇴원 후 ‘접근 금지 처분’이라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어느 날 팻은 자신보다 정신적으로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한 여자, ‘티파니’를 만납니다. 티파니는 남편의 사망 후 회사 직원 모두와 성적인 관계를 맺다 직장에서 잘리고 방황합니다. 남편이 죽은 게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서 발현된 일종의 이상행동이었습니다.
갈피를 못 잡는 주인공들, 이 두 사람은 친구 가족의 저녁 식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정상성’과는 거리가 먼 서로를 보며 끌림을 느낍니다. 티파니는 팻의 아내에게 그가 쓴 편지를 전달해주겠다는 조건으로 같이 댄스 대회에 나가자고 제안합니다.
댄스 대회를 준비하면서 둘은 아주 조금씩 변해갑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팻, 과거를 놓아주려 하는 티파니. 두 인물은 이제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 합니다.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 과정이 이들에게 다시금 일어설 힘을 줍니다.
영화 속 팻과 티파니는 시한폭탄 같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이들의 말과 행동에 공감하게 됩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 모두 부족한 모습이 하나씩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인지 영화 제목에 담긴 의미는 제법 묵직합니다. ‘실버라이닝’은 먹구름 테두리로 새어나오는 한 줄기 밝은 빛을 의미합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한 줄기 희망은 혼자 세우는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에 있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어딘가 하나씩 부족한,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인 인물들이 함께하는 이야기가 보고 싶을 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꺼내봤으면 합니다.
■어둠 속으로 시즌1(2020). OTT 넷플릭스┃김태강 사회부 수습기자
#불확실한 미래
흔히 ‘빛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태양 빛없이 지구상의 생명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선 다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어둠 속으로’에서 태양 빛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이치를 뒤집는 설정으로 시청자에게 신선한 충격과 함께 흥미를 유발하죠.
‘어둠 속으로’는 나토군 장교 테렌치오가 태양 빛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행기를 탈취하며 시작됩니다. 작중 태양 빛은 인간에게 죽음을 의미합니다. 기이한 우주 현상으로 변한 탓이죠. 태양 빛에 노출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테렌치오는 비행기를 몰고 기존 목적지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합니다.
처음엔 반발하던 탑승객들도 지상에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들을 보며 테렌치오의 말을 믿게 됩니다. 어두컴컴한 비행기 안에서 주인공들 간 협동과 배신이 쉴 틈 없이 전개되며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주인공들이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가며 생존하는 모습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과 반전은 몰입도를 높입니다.
현재 ‘어둠 속으로’는 시즌2까지 공개됐습니다. 시즌1에 비해 시즌2는 다소 지루하고 답답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시즌2가 지난 2021년에 공개된 후 시즌3에 대한 추가 소식이 없어 드라마가 이어질지도 미지수입니다.
그럼에도 ‘어둠 속으로’가 흥미로운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마치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네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어둠’이라는 생존 조건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상황에 처해있죠. 한 치 앞을 모르는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 드라마를 보며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긴 추석 연휴 동안 ‘어둠 속으로’를 보며, 올 한 해 바쁘게 달려온 자신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요.
■MBC 베스트극장(1991~2007). OTT 웨이브┃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뉴트로 사각지대
말 그대로 저만 알고 싶었습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서랍에 보관해둔 오래된 편지를 꺼내 읽듯, 작품 한 편 한 편에 담긴 진심을 마주하는 게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OTT가 점령한 시대, 이제는 아무도 보지 않는 단막극을 발굴해 일부러 찾아본다는 일종의 문화적인 ‘허영심’도 있었죠. 물론 한창 방영했을 당시에는 너무도 유명한 메이저 콘텐츠였겠지만요.
지난 1991년 7월7일 전파를 탄 1회부터 2007년 3월10일을 끝으로 막을 내린 664회까지, 선택의 폭은 매우 넓습니다. 1시간가량 되는 에피소드는 각각 별개의 단편 드라마입니다. 모두 연출자와 작가가 다릅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인 독자들은 이중 대체 무얼 봐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MBC 베스트극장’을 즐기는 저만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첫째, ‘기라성 같은 드라마 작가들의 데뷔작 혹은 초기작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노희경, 임성한, 김도우…. 유명 드라마 작가들의 이름을 포털에 검색하면 해당하는 에피소드를 손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이들의 신인 시절 작품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용기가 샘솟기도 합니다. 공모에 당선되기 위해 간절한 염원을 담아 방송국에 극본을 부치는 젊은 거장들의 모습이 상상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투를 거치고서 마침내 시청자와 만났다고 생각하니, 이 단편들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두 번째는 ‘메타적으로 관람하기’입니다. 방영 당시의 시대를 초월해 비판적으로 보거나, 현재와 연결고리를 찾는 것입니다.
배우 김혜수와 故박용하가 출연했던 ‘적들의 사회’(313회·극본 황선영/연출 김윤철)라는 에피소드를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1998년 작품인 이 단막극은 신문사 문화부 여자 기자를 바라보는 당대의 그릇된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여자 기자는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남성들이 성적으로 대상화하기 좋은 캐릭터로 등장하죠. 지금 보면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화가 나는 수준을 넘어 오히려 웃음이 납니다.
하지만 예술마저도 세속화시켜 돈벌이에 이용하는 상황, 그러니깐 고상한 척하는 속물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비판하는 주제의식은 2024년인 현재도 유효합니다. 어쩌면 작품이 지닌 명암의 대비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지점인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냥 아무 에피소드나 클릭해보는 것’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당시의 드라마 문법은 낯설면서도 흥미롭습니다. 문학 작품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구절을 배우들이 ‘서울 사투리’로 내뱉습니다. 말하자면 재현이 아닌, 원본을 볼 수 있는 기회랄까요. 특별한 경험이라 할 수 있죠.
긴 연휴에 볼만한 ‘MBC 베스트극장’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남기며 ‘구간탐색(舊刊探索)’ 첫 편을 마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저만 알고 싶었던 것들입니다. ‘원점’(29회·극본 이미혜/연출 김한영), ‘사랑한다면 그녀처럼’(288회·극본 구선경/연출 오경훈), ‘차차차, 코리아 블루스’(337회·극본 고동률/연출 임화민), ‘내 딸 소란이’(523회·극본 여은희/연출 임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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