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의 땅’ 이어 ‘67번째 천산갑’ 출간
게이인 그·헤테로 그녀 우정 그려
가부장제 아래 '이등 시민'들 위로
누나 7명 경험 녹여… 부조리 묘사
대만 소설가 천쓰홍이 지난 9일 서울 중구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를 앞두고 돌담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4.9.9 /민음사 제공 |
■ 67번째 천산갑┃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민음사 펴냄. 492쪽. 1만8천원
"저는 남성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성소수자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요. 이번에 출간한 '67번째 천산갑'을 통해 게이인 남자 주인공과 헤테로(이성애자)인 여자 주인공, 둘의 미묘한 관계를 말하고 싶었어요. 가부장제 아래서 여성과 성소수자 남성은 둘 다 '이등 시민'으로 취급되니까요."
커밍아웃한 대만의 유명 게이 소설가 천쓰홍(48). 전작 '귀신들의 땅'(2023)으로 대만 최고의 양대 문학상을 받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책이 1만5천부가 넘게 판매되는 등 깜짝 인기를 끌었던 그가 장편 신작 '67번째 천산갑'으로 한국 독자를 다시 찾았다. 지난 9일 서울시 중구 광화문 인근에서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해 출간된 장편 ‘귀신들의 땅’에 이어 신간 ‘67번째 천산갑’을 들고 한국 독자를 찾은 대만 소설가 천쓰홍이 지난 9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민음사 제공 |
'67번째 천산갑'은 게이 남성인 '그'와 헤테로 여성인 '그녀'가 소수자로서 마주하는 아픔과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동성 연인 J를 먼저 떠나보낸 그는 공허하게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다. 그는 고향인 대만에서도 가족에게조차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지내왔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그녀는 거물 정치인의 아내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화려한 삶을 사는 듯 보이나 실상은 '트로피 와이프'다.
이런 두 주인공의 관계는 중화권 단어 '게이미(Gay蜜)'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서로 막역하게 지내는 여성과 게이 남성 사이를 뜻한다.
소설은 게이미로 엮인 두 사람이 프랑스 낭트를 향해 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들의 우정은 잠시 소원해졌다 중년이 된 현재 시점에서 함께 차를 타고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무르익는다. 장면 장면은 마치 버디무비나 로드무비를 떠올리게 한다. 파리-대만-투르-낭트로 배경이 전환될 때마다 기억에 숨어 있던 과거 사건들이 두 주인공을 쫓아온다.
국내 출간된 대만 소설가 천쓰홍의 작품. ‘67번째 천산갑’(2024), ‘귀신들의 땅’(2023). /민음사 제공 |
책을 읽다 보면 한국 퀴어 문학의 베스트셀러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2019)에 수록된 단편 '재희'가 연상되기도 한다. 게이 남성과 헤테로 여성의 우정, 그리고 임신중지라는 소설 속 사건이 맞물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67번째 천산갑'은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겪는 부조리를 더욱 세심하게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남성 작가가 표현했지만, 실제 여성들의 삶과 결코 괴리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대만 융징향의 한 농가에서 아홉째 '막둥이'로 태어난 천쓰홍의 경험이 녹아 있다.
"저는 누나가 일곱 명 있어요. 대만 사회에서 누나 일곱이 연속으로 태어난 것은 남존여비가 워낙 강한 탓이죠. 딱히 낳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키운…. 그런 누나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성들이 어떤 슬픔을 가졌는지 알게 됐어요. 그래서 소설을 통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대만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혼이 법제화된 국가이나, 천쓰홍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는 나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대만의 대도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울지라도 농촌 지역은 성소수자들이 생존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이름 옆에 붙는 '게이 소설가'라는 타이틀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지난해 출간된 장편 ‘귀신들의 땅’에 이어 신간 ‘67번째 천산갑’을 들고 한국 독자를 찾은 대만 소설가 천쓰홍이 지난 9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민음사 제공 |
천쓰홍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심한 한국 사회에 대해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더욱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한국의 퀴어 예술가들이) 압박감을 많이 느끼고, 존재하고 있음에도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충분히 이해된다"고 했다.
이런 한국 사회의 한편에서는 헤테로 소설가가 퀴어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이에 대해 천쓰홍은 "작가와 문단에서도 아주 많이 고민하는 문제"라며 "마침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인데, 영국에서 자란 일본 작가의 소설이다. 이 사람은 일본인이지만 영국인의 시선으로 세계대전 이후의 이야기를 썼다"고 운을 뗐다.
이어 "만약 헤테로인 사람이 퀴어 서사를 쓴다 할지라도 그 속에 당사자를 향한 '존중'이 남아 있다면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물론 여러 도덕적인 문제가 있을 수는 있겠다"며 "한국에서 수많은 헤테로 작가들이 퀴어 소설을 쓰게 된다면, 앞으로 퀴어들이 자유로울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담담히 말했다.
대만 소설가 천쓰홍이 지난 9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읽고 있는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예시로 들며 창작 윤리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2024.9.9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
그렇다면 존중을 '부러' 계산할 필요가 없는, 정체성이 게이인 천쓰홍에게 집필하는 행위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는 퀴어 당사자임을 공표하고서 실제 자신의 삶을 토대로 대중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한마디로 명쾌하게 정의할 순 없겠지만, 그의 글은 단순히 잘 쓴 '퀴어 장르물'이 아닌 삶의 진실을 좇는, 진심이 담긴 '문학'인 것만은 분명하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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