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임에도 '다큐의 가치'는 빛난다
인도정부 농업법 50만명 반대시위 '공존' 새 모델
네팔 내전 성폭행·고문 증언… 트라우마 극복 여정
조부모와 생활한 이혼가정 소녀 '감정적 파고' 포착
청각장애 무용수 '자신만의 음악'으로 창조적 예술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DMZ Docs) 인더스트리는 한국과 아시아의 우수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발굴해 지원하고 육성하는 프로그램이다.
그중에서 'DMZ Docs 피치'는 현재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글로벌 다큐멘터리 산업 관계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으로,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이 전문가들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펀딩을 확보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DMZ Docs 인더스트리를 디딤돌 삼은 작품들이 결실을 보고 있다.
이는 DMZ Docs의 역할과 취지를 되짚어 보게 하며 그 의미를 더한다.
◆ 혁명을 경작하다
(2021 DMZ Docs 인더스트리 프로덕션 피치 참가)
2024 DMZ Docs의 개막작인 '혁명을 경작하다'는 코로나19 봉쇄 기간 인도 정부가 제정한 농업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 현장을 보여준다. 모든 세대와 종교, 계급을 아우르는 50만 명의 시위대가 공존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냈다.
투철하고 선명한 문제의식으로 명성 높은 니쉬타 자인과 인도 다큐멘터리의 차세대 주자인 아카시 바수마타리의 협업으로 완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풀뿌리 민중의 지혜와 용기를 증언하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길 위에 선 민중들의 집합적 이미지와 그들의 대화에 무게를 싣는 영화는 놀라운 헌신과 연대, 들끓는 분노의 원천을 확인하는 동시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순간들을 담아낸다.
두 감독은 빛나는 승리의 감동은 물론, 그것을 위해 치른 희생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는 인도를 넘어 대립과 불평등, 각자도생의 시대를 사는 이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 데비
(2022 DMZ Docs 인더스트리 프로덕션 피치 참가, 최우수상)
이야기는 1997년 네팔, 내전이 막 시작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일곱 살 소녀 데비는 반국 혐의로 체포돼 고문과 성폭행을 당하고, 반국 지도자들이 그녀를 성폭행 피해자로 공개하면서 수치스러운 낙인도 찍히게 된다.
우울증과 배제에 맞서 싸운 데비는 역설적으로 반군에 합류하고, 전쟁이 끝난 후 의회 의원으로 활동한다.
데비는 이 전쟁 폭력을 공개적으로 증언한 유일한 생존자인 동시에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던 수많은 생존자의 대변인이다. 수비나 슈레스타 감독은 오랫동안 작성된 데비의 일기와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유려하게 재구성하며, 현재의 데비가 마주하는 곤경을 밀착해 담아냈다.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데비의 여정은 전 세계 곳곳에서 여성과 약자를 대상으로 자행되는 위계적 폭력을 성찰하는 소중한 지침이 될 것이다.
◆ 나를 지켜줘
(2023 DMZ Docs 인더스트리 러프컷 피치 참가, 최우수상)
'나를 지켜줘'는 매력적이면서 비상한 주인공, 사회의 모순을 축소해 놓은 듯한 복잡한 가족 드라마, 이를 충실하고 독창적으로 담아내는 영화적 언어를 절묘하게 버무렸다.
아티에 자레 아란디 감독은 자신의 장편 데뷔작에서 당돌하고 솔직한 태도로 가족과 돌봄에 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9살 조카 멜리나와 동행한다.
멜리나는 이혼한 부모 모두에게 거부당하고 조부모와 살고 있는 이란 소녀이다. 영화는 멜리나가 부모에게 느끼는 실망과 분노뿐 아니라 그녀를 진심으로 보살피는 조부모와의 애틋한 순간까지 두루 담았다.
너무도 빨리 세상의 슬픔을 알게 된 소녀의 감정적 파고를 포착한 작품은 멜리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녀가 부모와 그들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애정을 가지고 독려한다.
◆ 소리없이 나빌레라
(2023 DMZ Docs 인더스트리 러프컷 피치 참가, 우수상)
보청기에 의지하는 청각장애 무용수 고아라는 갓난아기의 엄마가 된 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아기를 위한 자장가를 부른다. 그녀는 이를 계기로 음악의 즐거움을 깨달으며,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소리없이 나빌레라'는 무대 위에 선 그녀의 몸짓과 함께 고민과 걱정, 기쁨이 교차하는 일상을 포착한다. 그녀가 음악을 감각 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장애는 그녀를 한계 짓는 규정이 아니라, 고유한 예술 세계를 창출하는 조건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도, 장애와 비장애의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는 한 무용수의 움직임과 그녀를 위한 음악, 그것이 전달하는 새로운 감각의 영역만이 있을 뿐이다.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예술에 대한 믿음이 무엇보다 투철한 작품이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