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우의 ‘아웃사이드’

[장제우의 '아웃사이드'] 딥페이크 지인능욕 시대의 남녀관계 뉴노멀

입력 2024-09-29 19:45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9-30 18면
한국, 세계 성착취물 53% '심각'
소설 '우리가 끝이야'가 말해주듯
여성 폭력 과민반응 문제라는
비상식적 남성의 연인 점점 줄어
법 통해 적극적 수사·처벌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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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우 작가
지난 26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비쟁점 법안 77건이 통과되었다. 출산 및 육아휴직,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의 확대와 같은 저출산 대책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가운데 그에 못지않은 관심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안, 일명 '딥페이크 처벌법'에 쏟아졌다. 온갖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의 부족은 여성의 목소리를 폄하하는 성차별 문화의 일환이고, 이것이 초저출산의 거대한 지반임을 많은 여성들이 지적해온 바, 딥페이크 처벌법이 저출산 대책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로맨스 소설 '우리가 끝이야(It Ends With Us)'는 전 세계 1천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로, 최근 개봉한 동명의 영화도 글로벌 박스오피스 4천억원을 돌파하며 제작비의 열 배가 넘는 흥행수익을 올렸다. 로맨스 장르로는 드물게 벌어진 세계적 열풍의 진원지는 틱톡에 서평을 올린 여성팬들이었다. 2016년 미국에서 발표된 이 소설은 그해 3만6천부의 인쇄본을 판매하며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여성들을 마니아로 만들었고 이들의 자발적인 홍보에 힘입어 세계적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우리가 끝이야'는 어머니 세대와 다른, 그러나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은, 여성의 삶과 연애, 결혼, 출산 등을 다루는 작품들의 조류와 결을 같이한다. 예를 들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인 2021년 노르웨이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The Worst Person in the World)'는 페미니즘과 미투운동을 직접적인 소재로 삼고는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여성이 성차별주의자로 비판받는 유명 만화가와 사랑에 빠지고, 동거하고, 임신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풀어낸다(이별의 이유와 젠더 전쟁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2022년작 프랑스 영화 '라이즈(Rise)'는 여성주의가 두드러지지는 않는 풋풋한 성장드라마인데, '썸'을 타는 관계에서 진도를 나가려 할 때 남성이 지켜야 할 상식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에티켓은 무엇인지 환갑에 이른 남성 감독의 시선으로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감초 역할을 맡은 한 동거 커플은 성차별에 둔감한 남성과 이를 참지 않는 여성의 조합이며, 이 차이 때문에 크게 다투다가도 정열적인 사랑의 공감대로 봉합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우리가 끝이야'는 진부하지만 흡입력 높은 삼각관계에 자수성가한 보스턴 중상류층의 화려한 삶을 양념으로 버무린 전통의 멜로물이다. 동시에 비전통적 요소가 작품을 관통한다. 교제폭력과 가정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이 어머니 세대와 달라진 주인공 릴리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인 흥행 기록을 쓴 '바비(Barbie)'처럼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는다. 하지만 그 이상의 메시지를 일상의 은유로 녹여냈다. 릴리는 작은 도시의 시장으로 존경받던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것을 보며 자랐다. 우연히 만난 '완벽남'의 진심어린 구애를 받아들인 릴리는 행복한 신혼의 와중에 아빠처럼 변해버린 남편을 마주하고 평생 참고 산 엄마와는 다른 길을 간다. 아무리 다른 부분이 훌륭하더라도 신체적으로 약한 상대에게 어떤 이유로든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런 이의 곁에 남아있을 여성은 과거보다 현저히 줄었다고 '우리가 끝이야'는 귀띔한다.

딥페이크 성범죄는 국제적으로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상황이다. 특히 한국은 전 세계 딥페이크 성착취물의 53%를 차지하고 있어 그 심각성이 더하다. 이런 마당에 안티페미니즘과 미소지니를 발판으로 인기를 끌며 청년 남성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한 유튜버는 딥페이크 사안을 여성의 선동에 의한 호들갑으로 규정하며 노골적인 여성혐오를 부추겼다. 보수적 청년 남성이 주 지지층인 개혁신당의 이준석 의원도 이 유튜버와 동일한 이유를 들어 '중요한 건 불안이 과장되지 않는 것'이라며 일갈한 바 있다.

'우리가 끝이야'가 말해주듯 여성에 대한 각종 폭력을 두고 과민한 반응이 문제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저런 비상식적인 남성들의 연인으로 남을 여성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번 딥페이크 처벌법으로 온오프에 만연하는 유해한 남성 문화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보다 적극적인 수사와 처벌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장제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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