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정의 ‘문득, 인권’

[안은정의 '문득, 인권'] 한강과 사라진 책들의 세계

입력 2024-10-13 19:42
지면 아이콘 지면 2024-10-14 18면
경기도교육청, 다양한 분야
유해도서 선정 문제 재조명
'책 폐기' 작가의 생각·고뇌 담긴
사상·철학이 사라진 것
청소년들 배움의 권리 침해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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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한강 열풍이다. 지난 10일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온 나라는 그녀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강이 만들어 낸 세계와 소설에 담긴 정서적 힘에 전 세계가 공명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수상 소식이 들려옴과 동시에 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10위권은 한강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집필했던 작품 세계와 그를 통해 언급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각종 매체를 통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강의 작품을 유해 도서로 지목했던 사회적 문제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졌던 경기도 학교 도서관 성평등·성교육 도서 대규모 폐기 사건이 그것이다.

지난해 경기도 내 학교 도서관에서 성평등·성교육 관련 책 2천500여 권이 대량으로 폐기되었다. 시작은 '청소년 유해 도서를 분리해달라'는 보수단체의 민원이었다. 민원 접수 이후 경기도교육청은 '각 학교에 부적절한 논란 내용이 포함된 도서에 대해 협의해 조치하라'는 공문을 여러 차례 일선 학교로 발송했다. 이후에는 성평등·성교육 도서 처리 현황을 보고하라는 공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모호한 경기도교육청의 기준이었다. 관리되어야 하는 도서 목록은 명시하지 않은 채, 청소년 유해 매체물 심의 기준과 보수단체의 입장이 실린 기사를 참고용으로 첨부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속에서 학교 현장은 보수단체가 임의 선정한 청소년 유해 도서 목록을 경기도교육청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청소년 유해 도서 목록은 성교육·성평등 도서 외에도 한강의 채식주의자 등 문학, 철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었다. 교육청에서 지속적으로 내려오는 공문, 처리 현황에 대한 보고 압박에서 자유로운 학교가 있겠는가. 결국 2천500여권의 책이 경기도 학교 도서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책 폐기에 대해 시민단체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경기도교육청은 학교가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한 일이라 책임을 일선 학교로 떠넘겼다. 폐기된 책을 복구시키기 위한 노력도 의지도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또다시 유해 도서 선정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자 발 빠르게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한강 작품은 1개 학교에서 2권만 폐기되었고 그것 역시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부적절한 논란 내용이 포함된 도서'라는 모호한 방향을 제시하며, 처리 현황을 압박하는 암묵적인 지시. 자율적인 선택 뒤에 무언의 의도가 보여지는 것은 왜일까.

2천500여 권에 달하는 책의 폐기는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물질이 도서관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다. 작가의 생각과 고뇌로 엮인 살아 숨 쉬는 세계, 책에 담긴 사상과 철학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는 청소년들이 배워야 할 지식과 철학의 세계가 실종된 것을 의미한다.

이 사건으로 청소년들은 배움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또 다른 지식의 세계를 탐구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일부 보수적인 단체의 자의적인 기준이 공적 교육 기관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 그 과정에서 교육청의 외면과 책임회피가 있었다는 점. 사라진 책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재발방지 대책도 부재하다는 점, 이 사건을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다.

소설가 한강은 이전 인터뷰에서 어릴 적 책과 한국 문학과 함께 자랐다고 언급했다. 책 속 세계로 갈 수 있기에 현실의 세계가 절대적이지 않았고 두 세계에서 살 수 있던 유년기가 자신을 도왔다 한다. 책과 더불어 성장했던 삶이 지금의 작가 한강을 있게 한 토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더 우려된다. 사라진 2천500여 권의 책이 누군가가 만들어가야 할 또 다른 세계의 토대가 아니었을지. 그 가능성을 폐기해버린 것은 아닐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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