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120년 산 식혈인(食血人)의 생애… 인천시립극단 ‘하늘의 적’

입력 2024-10-19 15:59 수정 2024-10-19 22:48

인간의 피 마시는 인간, 그를 둘러싼 인간 군상

기발한 상상력과 위트, 개성적 연출 어우러져

한국 초연, 원작자 “인천에서 불러줘 고맙다”

인천시립극단 ‘하늘의 적’ 공연 모습. 2024.10.17 /인천시립극단 제공

인천시립극단 ‘하늘의 적’ 공연 모습. 2024.10.17 /인천시립극단 제공

건강과 젊음을 되찾는 것은 물론 영원히 살게 해주는 식이요법이 있다면?
그 식이요법이 다름 아닌 ‘인간의 피’만 섭취하는 것이라면?

인천시립극단 연극 ‘하늘의적’ 이 던지는 물음

인천시립극단이 지난 17~18일 인천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에서 공연한 해외 명작 시리즈 두 번째 연극 ‘하늘의 적’의 첫날 무대를 관람했습니다. 일본 SF 호러 문학의 대가 마에카와 토모히로 원작의 국내 초연입니다.

기발한 상상력과 위트가 넘치는 이야기, 인간의 욕망 그리고 생과 사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 미디어월과 회전 무대를 활용한 개성 있는 연출,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가 맛깔나게 어우러진 성찬이었습니다.

■ 뜻밖의 고백 “나는 122살이라네”

인천시립극단 ‘하늘의 적’ 공연 모습. 2024.10.17 /인천시립극단 제공

인천시립극단 ‘하늘의 적’ 공연 모습. 2024.10.17 /인천시립극단 제공

이야기는 요리 프로그램 촬영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채식 전문가 하시모토가 파트너 메구미와 함께 시청자에게 자신의 채식 식이요법을 소개하네요. 조미료를 최소화하고 채소의 순수한 맛을 극대화하는 하시모토의 레시피는 건강식으로 주목받는 듯 보입니다.

하시모토는 촬영을 마치고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기자 미츠루를 만납니다. 미츠루는 하시모토의 요리교실 수강생인 유코의 남편이기도 하죠. 미츠루는 근육이 굳어가는 불치병을 앓고 있고, 유코는 남편을 위해 하시모토에게 식이요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한데 미츠루는 취재 도중 하시모토가 1940년대 민간요법을 책으로 정리한 우타로라는 의사와 매우 닮았다며, 혹시 후손이냐고 묻는데요. 하시모토는 믿기지 않는 고백을 하네요. 자신이 우타로이며, 1895년생이고 올해 나이는 122살이라고.

그리고 이야기는 하시모토가 미츠루에게 지난날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시모토, 즉 우타로가 인간의 피를 마시는 식이요법을 발견하면서 젊어지고 건강해지며 늙지도 죽지도 않게 되는 과정을 1차 세계대전 말, 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 1950년대, 1980년대, 2000년대 등 시간 순으로 풀어냅니다.

■ 초월적 존재된 ‘식혈인’의 고뇌

인천시립극단 ‘하늘의 적’ 공연 모습. 2024.10.17 /인천시립극단 제공

인천시립극단 ‘하늘의 적’ 공연 모습. 2024.10.17 /인천시립극단 제공

젊음과 건강을 얻는 대신 해를 보지 못하게 된 ‘식혈인’ 우타로. 그의 비밀을 여러 등장인물들이 공유하게 되고, 그 속에서 고민과 갈등이 생겨납니다. 인간의 피를 마시고 젊음과 건강을 되찾았지만, 제한된 생활과 음식에 대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비극적 결말을 맞는 우타로의 아내, 자신은 절대 피를 마시지 않겠다는 우타로의 연구자이자 스승, 젊음과 영생의 유혹(식혈)을 끝내 이기지 못하는 후손들.

초월적 존재가 된 우타로조차, “내 시간은 (앞으로) 가지 않으니 모두 어제다”라며 고뇌합니다. 모든 욕망이 삭제된 줄 알았던 그조차 ‘채식주의자의 피’ 맛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욕망이란 무엇인가’라며 계속해서 관객에게 묻는 듯합니다. 그리고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우타로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피를 빨아먹을 것”이라고 암울한 미래를 전망하며 자신 이후 누구도 피를 마셔선 안 된다고 소리칩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로도 느껴졌습니다.

원작자 마에카와 토모히로는 이번 공연에 대해 축하 메시지를 전하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음식과 건강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심에서 출발해, 하시모토 선생의 호기심이 찾아낸 것이란, 특권적 인간들의 욕망을 불러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 회전 무대 활용 등 인상적

지난 17일 부평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인천시립극단 ‘하늘의 적’ 원작자 마에카와 토모히로가 이날 공연이 끝난 후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4.10.17 /인천시립극단 제공

지난 17일 부평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인천시립극단 ‘하늘의 적’ 원작자 마에카와 토모히로가 이날 공연이 끝난 후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4.10.17 /인천시립극단 제공

이번 공연에서 회전 무대는 단순히 배경을 교체하는 기능뿐 아니라 인물의 움직임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무대의 깊이감을 더하는 등 독특한 미장센을 연출하기 위해 활용됐습니다.

특히 미츠루가 하시모토의 고백을 모두 듣고 혼란에 휩싸이는 극의 말미에선 모든 등장인물들이 나와 빙글빙글 계속 돌아가는 회전 무대에서 ‘환상 또는 혼돈’의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일품이었습니다. 뮤지컬을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배우들의 합이 딱딱 맞아떨어지더군요.

이번 공연을 연출한 이대웅 연출가의 말은 이렇습니다. “‘하늘의 적’은 미스터리 투성의 인생의 필름을 담은 연극입니다. 잔잔한 일상을 가장한 인물들의 이면에는 미스터리한 매듭이 묶여 있습니다. 이 연극을 진행하면서 하시모토라는 인물의 인생의 필름을 잠시 멈춰보거나 되돌려 보면서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다시 일상을 바라보게 될까 하는 질문을 합니다.”

17일에는 원작자 마에카와 토모히로가 부평아트센터를 찾아 한국에서 초연을 하는 이번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공연이 끝난 후 “‘하늘의 적’ 한국 초연을 인천에서 인천시립극단이 불러 줘 기쁘게 생각한다”며 “연극이란 장르는 공연을 되풀이하면서 발전하는 것 같다. 관객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말했습니다.

인천시립극단이 선보이고 있는 해외 명작 시리즈에 대한 반응이 좋습니다. 인천시립극단이 지난 4월 부평아트센터 무대에 올렸던 첫 해외 명작 시리즈 ‘화염’(와즈디 무아와드 원작)은 내년 5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앙코르 공연을 개최합니다. ‘하늘의 적’도 앙코르가 성사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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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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