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창간특집

수질만 챙긴 규제… 주민들 삶은 바닥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3)]

입력 2024-10-24 21:33 수정 2024-10-24 21:45
지면 아이콘 지면 2024-10-25 10면

팔당호를 곁에 두고 살아온 사람들의 목소리


# 일상의 제약 참고 견뎌온 강천심씨의 분노

"비 오는 날 처마 하나만 설치해도 벌금냈는데
그런 곳에 골프장 들어선다니… 그것도 5개나"

# 한평생 조업 해온 어부 조구봉씨의 하소연



"'대한민국서 가장 못사는 동네' 먹고살기 막막
장사하다 검찰조사… 10대째 바뀐 게 없는 삶"

# 팔당호 '마지막 뱃사공' 이귀현씨의 그리움

"두물머리~남양주 귀여리 1㎞ 뱃삯 250원 시절
황포 돛단배 하나 타고 서울 오가던 기억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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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의 강산이 5번 바뀌었다. 생태계도 변하는 강산을 따라 변화했고, 또 나름은 적응했다. 하지만 팔당을 둘러싼 인간사는 그렇지 못했다. 개발과 보전이라는 깊게 팬 갈등의 골은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주도한 팔당댐 개발로 주민들은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이 바뀌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땅에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싶은 주민들의 바람은 개발 이후 무너졌다.

팔당상수원 보호라는 미명 아래 팔당호 인근 7개 지역 (용인·이천·광주·여주·양평·남양주·가평) 주민들은 모든 행위에 제동이 걸렸다. 살고 있는 팔당의 땅에선 자유로운 경제활동도, 일상적 활동에도 제약이 많아졌다. 그렇게 50년이 흘렀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주민들은 팔당을 떠나지 않았다. "팔당 인접지역의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민의 하소연에 고향에 대한 애틋함마저 묻어난다. 팔당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총궐기대회
팔당호 인접지역 주민과 춘천, 충주 시민 등은 지난 1998년 11월19일 서울 여의도에서 모여 100만인 총궐기대회를 진행했다. 궐기대회는 환경부가 발표한 팔당호 등 상수원 수질관리 특별종합대책의 불합리함을 알리기 위해 열렸다. /가평범대위 한강지키기운동 가평지역본부 제공

■ 평범한 주부가 주민 대표가 된 사연


"비 오는 날 처마 하나만 설치해도 벌금을 냈어요. 그게 상수원(보호구역) 규제 지역에 사는 주민의 삶입니다. 그런 광주에 골프장이 들어온다니요. 그것도 무더기로 5개나…."

대규모 골프장이라니,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광주, 그것도 팔당 상수원지역에서 살아온 강천심 특별대책지역 수질보전정책협의회 광주시대표는 상수원 인근에 대규모 골프장 5곳이 건설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상수원 보호구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 곳 주민들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제약을 받았다.

그럼에도 참고 견뎌온 것은 수도권 시민의 젖줄인 팔당, 팔당에서도 상수원에 살기 때문이었다. 그런 강 대표에게 골프장 건설 소식은 '불합리' 그 자체였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분노였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군청과 국회를 찾아가고 차가운 거리에 나가 '규제철폐'를 외친 이유다.

"먼저 광주군민에게 불합리함을 알렸어요. 수질 보전을 이유로 각종 규제를 해왔는데 대기업 골프장 개발은 되는 건가, 억울한 마음이 컸습니다. 그때는 (이 지역엔) 하수종말처리장도 없을 때니까요. 국회의원, 광주군수, 인근 상수원 지역의 시장들까지 다 만났어요. (그 결과) 국내 골프장에서 맹독성이 아닌 저독성 농약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그게 첫 성과였죠."

그렇지만 골프장이 건설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강 대표는 1993년 환경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평범한 주부였던 강씨가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에는 광주군민 60여명과 함께 경안천시민연대를 꾸렸다.

1998년, 강 대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정책이 나왔다. '팔당호 등 상수원 수질관리 특별종합대책', 말 그대로 식수원 보전을 위한 특별 대책이었다. 주된 내용은 북한강과 남한강 양안 0.5~1㎞를 수변구역으로 지정하는 것이었다. 오염원을 배출할 수 있는 숙박시설과 공장, 음식점 등의 설치가 금지될 수밖에 없다. 사실상 광주지역 전체가 중첩 규제를 받게 된 셈이다. 광주는 이미 자연보전권역, 특별대책지역 등으로 인해 곳곳의 개발이 제한돼 있었다.

"이전에는 우리나라가 재정도 빈약하고 (정화)기술도 녹록지 않았으니, (주민들이) 규제로 인한 희생도 참아왔던 거죠. 팔당 상수원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도 규제뿐이었고요. 숙명처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건데… 또 한번 규제가 발표된 거예요. 차라리 지역 전체를 이주시켜라, 더는 이렇게 못산다고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던거죠."

규제에만 천착된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에 분노한 건 강 대표만이 아니었다. 팔당에 인접한 지역의 주민들 상당수가 거리로 나섰다. 거리 항쟁은 들불처럼 번졌다. 북한강과 남한강 물줄기가 흐르는 강원도 춘천, 충청북도 충주 시민까지 궐기 대회에 참여했다. 규모는 100만명에 이르렀다.

"(당시) 25년간 억눌려왔던 규제에 대한 감정이 표출된 거죠. 팔당 인근 상가 대다수가 철시하기도 했는데,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거든요. 생업을 전폐하고 거리에 나선 겁니다. 참고 참아왔던 게 일시에 터진 거죠."

대규모 궐기 대회가 이후로도 4차례가 더 열리고 나서 2003년 '팔당호수질보존정책협의회'가 태동할 수 있었다. 협의회는 환경부·지자체·팔당 인접지역 주민들이 함께하는 정책기구다. 국내 첫 민관협의체이기도 하다.

"이때까진 정부가 일방적으로 규제안을 발표했어요. 지역 여론이나 주민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입법예고를 해버려요. 그래서 끈질기게 정책 제정단계에서부터 주민과 함께 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달라고 정부에 제안한 거죠." 협의회는 현재, 특별대책지역 수질보전정책협의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난해 협의회 출범 20주년을 맞았고 지금도 여전히 주민들은 주민에게만 불리한 '규제'들과 싸우고 있다.

구봉씨.
팔당호 어부인 조구봉씨는 남양주 조암면에서 산다. 이곳 토박이인 조씨는 팔당호 인접지역에 대한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야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조씨가 구봉호를 타고 팔당호 물살을 가르는 모습. 2024.10.23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 먹고살자고 한 일인데 전과자가 돼 있었다

팔당댐이 건설되고 많은 수는 삶의 터전이었던 팔당을 떠났지만 또 많은 수는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고향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다. 2024년을 사는 이들의 삶은 여전히 1970년대, 댐이 건설되던 그때에 머물러있다. 수도권 곳곳이 천지개벽하는 지난 반세기 동안 팔당호 인접 지역의 모습은 거의 그대로다.

'수도권정비계획법' '환경정책기본법' '한강수계법' 등 팔당호 인근 주민의 삶을 옭아매는 각종 규제들은 이름이 달랐지만 수질을 보전한다는 이유로 개발을 제한한다는 취지는 동일했다. 이들 규제로 팔당호는 주민들에게 때론 삶을 옭아매는 굴레가 되기도 했다. 남양주에서 한평생 조업을 해온 어부 조구봉씨는 팔당 규제를 묻자 격한 감정을 내비쳤다. → 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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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못 버는 게 제일 서러웠죠. 그런데 어떡합니까. 먹고 살려고, 물고기 잡아다 장사를 해야 할거 아닙니까. 근데 허가를 안 내주니, 20년동안 무허가로 장사하다가 벌금만 내고, 검찰 조사 받고. 제가 뭐 도둑질을 했답니까. 내가 내땅에 장사한다는데…다른 곳과 비교해봐요. 열불이 뻗칩니다. 우리 조상부터 10대째 살고 있는데, 삶이 바뀐 게 없습니다."

조씨가 거주하는 남양주 조암면은 마을 전체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다. 1973년 댐 완성과 함께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후 현재까지도 그 규제가 이어지고 있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새로 집을 지어 이사오는 것도 불가능할 만큼, 개발이 불가능한 탓에 이곳에는 식당, 이발소 등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편의시설조차 들어서지 못한다.

그는 조암면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못사는 동네'라고 소개했다. "먹고 사는 게 막막하잖아요. 이 동네에 일 보러 왔다가 백반 한그릇 먹을 데가 없으니 다들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돈 있는 사람들 별장 짓고 살기는 딱 좋은 동네죠. 서울이랑 가깝고 인구는 안 늘고, 공기까지 좋으니까요. 살기가 막막한 주민들만 자꾸 떠나는 겁니다."

팔당의 다른 지역도 상황은 비슷하다. 양평 두물머리는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며 배가 정박하는 일종의 나루터였다. 댐이 건설돼 강폭이 멀어졌고, 더이상 정박지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팔당호 마지막 뱃사공으로 불리는 이귀현씨는 두물머리에서 사라진 옛 뱃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옅은 웃음을 보였다. 그는 추억 속 두물머리를 이렇게 회고한다.

"두물머리에서 남양주 귀여리까지 1킬로미터 정도 됐거든요. 뱃삯은 처음에 250원이었다가 댐이 건설될 쯤 450~500원 정도였습니다. 양수리에서 오일장이 열렸는데 귀여리 사람들이 참외, 수박 농사 지은 것을 장 서는 날 와서 팔고 그랬어요. 황포 돛단배 하나 타고 서울까지 오가기도 했는데 그때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하루 뱃삯은 단돈 몇천원이었지만, 그에겐 소중한 일자리였다. 그 강을 매개로 그는 물고기를 잡아 팔기도 했다. 하지만 댐 건설 후 그는 생계를 잃었다. 뱃일로 가정을 일궈오던 이씨는 결국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다.

"(뱃사공을 더이상 못하게 됐을 때) 다른 지역에 살면서 광주에 있는 가족을 보러 다녔던 이들까지 아쉬워했어요. 뱃길이 없으니 광주까지 가려면 양평, 하남으로 돌아가야 했거든요. 나도 미련이 남아 지금은 옛날에 타던 배를 황포돛단배로 꾸며서 드라마나 광고 촬영하는데 사용합니다."

이귀현씨
팔당호 마지막 뱃사공인 이귀현씨가 양평 두물머리에서 타던 배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팔당댐이 생기면서 물길이 깊어지자 이씨는 더이상 배를 탈 수 없게 됐다. 뱃일에 미련이 남은 이씨는 드라마나 광고 등에 뱃사공으로 출연하고 있다. 2024.10.23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 "애증의 팔당호"…인접지역 주민들의 바람


팔당호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인접 지역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은 애증, 그 자체다. 분하고 억울한 감정이 마음 속 한편에 들어차면서도 조상 대대로 터를 이어온 고향, 삶의 추억이 깃든 공간임은 변함이 없어서다. 억울함을 토로하는 조씨에게 왜 고향을 버리지 않았냐 물었다.

"어릴 때 아버지와 뱃일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태어난 고향을 버리고 어디로 갑니까. 대를 이어서 살아온 땅이니까 함부로 나갈 수도 없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살아야죠. 우리가 떠나면 누가 이 곳을 지키겠어요."

그래도 주민들은 여전히 불합리한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말한다. 돈도 없고 기술도 없던 50년 전의 희생이 경제·과학기술의 강국이 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계속 이어져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천심 대표는 누구보다 주민들이 팔당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했다.

"규제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긴 시간 동안 희생한 주민들에게 적어도 이제는 없어도 되는 규제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50년동안 경제도 기술도 발달했으니까요…팔당호를 깨끗하게 보전해야 하는 건 주민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민들에게 팔당호는 삶의 터전이니까요."

/이종우·공지영·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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