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 닿지 않는 훈맹정음
"한강 읽고 싶지만…" 점자 없이는 노벨문학상도 먼 나라 이야기 [손끝에 닿지 않는 '훈맹정음'·(上)]
한글 점자의 날 '6개의 점'
시각장애인들 배워도 제대로 쓸 수 없는 환경
"점자책 준비된 서점 찾기 어려워…"
"생필품·가격표에라도 표기 됐으면…"
음성번역 발달해도 기초소통 수단
인천 미사용 32%, "배움 어려워" 25%
지난달 25일 인천 미추홀구 한 지역 서점에서 시각장애인 김경숙씨가 점자 표기가 없는 일반 서적들을 둘러보고 있다. 2024.10.25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탔다는데, 당연히 저도 읽어보고 싶죠. 근데 국내 어느 서점이든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책이 준비됐을 리가 있나요…."
지난달 25일 기자와 함께 인천 미추홀구 한 지역 서점을 둘러보던 시각장애인 김경숙(68)씨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등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점자 표기 없는 밋밋한 책 표지를 손으로 더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김씨는 2011년 5월 심장 수술을 받은 뒤 급격하게 시력을 잃어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중도 성인 시각장애인이다. 마음을 다잡고 세상과 다시 소통하고자 점자를 배운 게 벌써 13년 전이다.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꾸준히 점자를 익혀 이제는 전문가나 다름없지만, 정작 일상에서 점자를 쓸 일이 거의 없어 속상한 마음뿐이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책이나 음료에 표기된 성분 표시 등 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이 부족한 현실이다. 사진은 점자책을 읽는 한 시각장애인. /경인일보DB |
김씨는 "아직도 우리 사회는 시각장애인들의 일상을 위한 배려가 부족한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느 편의점을 가도 내가 고른 캔 음료가 사이다인지 콜라인지, 과자가 감자 맛인지, 초콜릿 맛인지 쉽게 구별할 방법이 없다"며 "심지어 급하게 약을 살 때도 두통약인지, 소화제인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알 수 있다"고 했다. 인도 곳곳에 끊기거나 잘못 표시된 점자 블록도 그에겐 크나큰 벽이다.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알아도 제대로 쓸 수 없는 환경이다. 우리의 귀한 자산인 훈맹정음이 외면받는 이유다. 인천시가 지난해 11월 완료한 '인천시 점자·수어 사용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113명)의 32.8%(37명)가 점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큰 이유는 '점자를 대체할 방법들이 있어서'(46.8%)였지만, '새로 점자를 배우기 어려워서'(25.5%) 또는 '점자가 필요하지 않아서'(23.4%)라는 응답자도 많았다. → 그래프 참조
김씨와 같이 점자를 배운 시각장애인들은 최근 음성 번역 등 대체 수단이 늘어나더라도, 결국 시각장애인들에겐 점자가 가장 기초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들도 언제든 자신의 생각이나 일상을 자유롭게 기록하고, 다른 사람이나 전자기기 도움 없이 정보를 얻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유럽 등 여러 국가가 점자 교육과 점자 콘텐츠 활성화에 주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 이순화 자립팀장은 "일본에 가보니 마트에서 샴푸가 '원 플러스 원'(1+1) 행사 중이라는 것도 점자로 알려주더라"며 "모든 상품, 모든 장소에 점자를 표기하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안다. 적어도 생필품에, 그것도 힘들면 상품 하나하나가 아닌 마트 가격표에라도 점자 스티커를 붙이는 등 작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희연기자 khy@kyeongin.com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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