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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박문여자중·고등학교 설립자인 장석우 선생을 거론하면서 아들인 '소계(少溪) 장광순(1907~1998)' 선생을 빼놓을 수는 없다.
장광순 선생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을 두고 양로원을 건립할 지 학교를 지을 지 고민하던 장석우 선생의 결심을 교육사업으로 굳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학교 설립 1년만에 유명을 달리 한 부친을 대신해 사실상 학교 운영을 책임지고, 해방 직후에는 천주교 서울교구에 학교를 넘겨줬다.
학교를 천주교 재단에 양도한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해방이 되자 입학시험에 불합격했던 학생의 학부형들이 집단으로 학교를 사회에 기증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 우리는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과거 동경(도쿄)에 있는 쌍엽(雙葉)학원을 시찰하였을 때 구내에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있어 함께 운영되는 것을 보고 나도 이런 학원을 설립해 보았으면 하는 욕심이랄까 욕망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에 기증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었을 때에는 차라리 유치원, 소학교에다 후일 대학까지 설립하면 한국의 쌍엽학원이 되어 여성교육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톨릭 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일제시대 인천부의회(현 시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한 탓에 해방 이후 친일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였지만 백범 김구선생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는 게 가족들의 주장이다.
선생의 호인 '소계'를 본떠 만든 장학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장남 장동현(62) 이사장은 어릴적 기억을 조금씩 떠올렸다.
“백범 선생이 나서서 할아버지와 아버님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받아 썼다고 하시면서 친일파가 아님을 강조해 주신 것으로 압니다. 백범 선생은 인천에 와서 머물 때면 저희 집에서 묵으시곤 했는데 주변에는 항상 건장한 청년단원들이 있어서 무척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장광순 선생은 해방 직전에 당시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한국화약 인천공장의 인수 제의를 거절한데 이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가 총살 위기도 맞았다고 가족들은 전하고 있다.
개교 50주년을 맞은 지난 1990년 박문여고 본관 건물 앞 광장에 세워진 아버지 장석우 선생의 흉상은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천주교 인천교구 나길모 주교를 찾아가 흉상 건립을 요청했지만 우상숭배 등의 이유로 거절당한 뒤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문여고 1회 동창회장인 이민각씨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지금의 자리에 흉상이 건립될 수 있었다고 한다.
<김도현기자·kdh69@kyeongin.com>김도현기자·kdh6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