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남시 풍산동에 위치한 제1가나안농군학교 전경.

※ 가나안 농군학교 연혁

▲1962년- 경기도 광주군(지금의 하남시 풍산동)에 제1가나안농군학교 설립. 농장 및 교회개척, 농민 및 사회지도자 교육

▲1973년- 강원도에 제2가나안농군학교 설립.

▲1989년- 가나안청소년교육원 설립사업(청소년에게 방학기간중 인성교육 실시)

▲1998년- 가나안효도학교 사업(범국민 효도실천운동 및 효사상 고취교육)

[경인일보=하남/이강범·이윤희기자]하남 미사지구에 포함돼 철거위기에 몰린 가나안 농군학교는 한국 현대사가 이룬 경제 기적의 저변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인 1935년부터 시작된 가나안농군학교는 저항과 개척의 역사로부터 시작됐다. 힘있는 민족, 잘사는 나라를 소망했던 일가(一家) 김용기(양주·1909~1988) 선생은 '한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괭이를'이라는 신념으로 가나안농장을 시작으로 개척의 역사를 시작했다.

조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메마른 황무지를 개척하고, 민중의 의식을 계몽하는 일을 해오던 김용기 선생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개척자적 정신을 심어주고 또한 함께 하기 위해 체계적인 교육훈련의 중요성을 깨닫고 1962년 경기도 광주군(현재 하남시 풍산동)에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더욱 많은 교육의 확대를 위해 강원도 원주에 지금의 제2가나안농군학교를 세웠다.

▲ 설립자 김용기선생
가나안농군학교는 김용기 선생의 사상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생활개혁 및 농업지도교육을 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됐다. 이는 조국의 경제발전과 국가적 정신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던 당시 시대적 상황속에서 새마을운동으로 태동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가나안농군학교와 김용기 선생이 정신적 기틀을 마련했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가나안농군학교는 지도자를 훈련시키고 농업기술을 전수하는 사회교육기관으로 발전하게 됐으며, 가나안정신을 전파해 생활개혁, 정신개혁을 일구어 나갔다.

지금의 가나안농군학교 역시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자산을 계승하고 있으며, 오늘날 발달된 과학문명속에 감추어진 역기능인 정신문화의 빈곤에 대한 답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달 초에는 일가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조직위원회가 대대적으로 선생의 교육이념(근로, 봉사, 희생)을 알리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공무원, 기업체, 학생 등 각계각층에서 교육을 받고 있으며, 일년에 7천명 가량 교육과정을 수료해 현재 다녀간 이들만 70여만 명에 이른다.

※ 인터뷰 / 제1가나안농군학교 수장 김평일 교장 "학교상징 본관주변 보존 됐으면"

설립자 김용기 선생의 아들이자 현 제1가나안농군학교 수장인 김평일(67·사진) 교장은 가나안농군학교의 이전은 정부정책이라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면서도 많은 아쉬움을 표했다.

"국민 노릇 잘하라고 가르쳐왔는데 국가정책을 반대할수 만은 없지요. 역사적 장소이고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라 떠나고 싶지 않지만 어쩔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남시 풍산동에 위치한 가나안농군학교 본관에서 만난 김 교장은 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못내 섭섭함을 드러냈다.


"비록 흙벽돌로 지었지만 새마을운동의 근원지로 63빌딩에 비할수 없는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김 교장은 "수용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학교의 상징이자 역사적 가치가 있는 학교 본관 주변만이라도 보존됐으면 한다"고 바람을 말했다.

가나안농군학교 본관의 경우, 지난 1955년 건립돼 김용기 선생과 가족들이 살림집으로 쓰다 가나안농군학교 설립후 학교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인근에 심어진 각종 나무 등은 아름드리를 뽐내며 울창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전과 관련 김 교장은 "수도권을 벗어나지 않는 곳으로 옮기려한다"며 "양평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보상문제 등이 남아 있고 비용문제도 간과할수 없어 고심중"이라고 밝혔다.

하남/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