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연합뉴스)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은 9일 독일은 마치 시곗바늘을 1989년 11월9일로 되돌린 듯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초청을 받은 유럽연합(EU) 27개국 정상 전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등 각국 사절들을 비롯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등 냉전 종식의의 주역들이 일제히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광장에서 열린 '자유의 축제'에 참석했다.

   각국 사절과 약 10만명의 인파가 참여한 `자유의 축제'는 저녁 7시 세계적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이끄는 슈타츠카펠레(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축하공연으로 시작돼 메르켈 총리와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의 연설이 이어졌다.

   ◇ 메르켈 "자유는 쟁취하고 지켜내는 것" = 독일 지도자들은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행사를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메르켈 총리는 "오늘은 내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 중 하루"라면서 그러나 11월9일이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일인 동시에 1938년 유대인에 대한 나치 박해의 신호탄으로 평가되는 '깨진 유리의 밤(크리스탈나흐트)' 기념일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자유는 우리의 정치, 사회 체제에서 가장 귀중한 자산"이라면서 "이 두 사건은 자유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고, 끊임없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도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를 언급하며 "우리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4개국 대표들은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행사 시작에 앞서 브란덴부르크 문 아래를 걸으며 분단의 종식과 평화에 대한 의지를 내보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 문 양편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전달한 축하 영상을 통해 "(베를린 장벽 붕괴보다) 독재에 대한 더 명백한 거부, 자유에 대한 더 강한 의지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물리적 장벽은 무너졌지만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우리가 극복해야 할 장벽들이 남아 있다"면서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도전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극복하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고 밝혔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억압에 맞서 투쟁해야 하고 여전히 세계, 도시, 지역, 나라를 가르는 장벽들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촉구를 의미한다"면서 "우리 모두는 형제이며 베를린 시민"이라고 선언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 일반 시민의 불굴의 정신, 모두의 위대한 힘으로 무너져 내렸다"면서 "핵무기 확산, 극도의 가난, 환경 재앙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다짐한다"고 강조했다.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를 가능케 한 소련의 역할을 강조한 뒤 여전히 서방과 러시아간에 놓인 이견과 불신을 겨냥한 듯 '우리의 유럽'에서 분단선을 제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여기 베를린에서 우리 모두는 앞에 놓인 장벽들을 거부하고, 대결의 시대를 끝내길 희망한다"면서 "우리의 아이들, 우리의 미래, 우리의 유럽을 위해 우리는 당신들과 이 문제에 대해 협력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 "우리는 하나" = 각국 정상들의 연설이 끝난 후에는 미국 록그룹 본 조비 등 각종 축하 공연과 대담 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장벽 쓰러뜨리기'가 라이히탁스우퍼에서 시작돼 약 40분간 진행됐다. 마지막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독일 가수 폴 반 다이크가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를 열창했다.

   1천개의 패널로 장벽의 붕괴를 재현하는 대규모 도미노 프로젝트에는 한국 대표로 소설가 황석영, 화가 서용선, 조각가 안규철 씨 등 3명이 참여했다. 이들 중 감기로 독일에 오지 못한 황 씨를 제외한 서용선 서울대 미대 교수,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이날 행사에 자리를 함께했다.

   특히 안 교수는 도미노가 진행되는 동안 독일 유명 방송인 토마스 고트샬크의 사회로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와 함께 공식 대담을 했다.

   안 교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만 세계에는 여전히 많은 장벽이 남아 있다"면서 "이번 행사가 다른 장벽들에도 관심을 갖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안 교수의 발언이 끝난 후에는 브란덴부르크 문 양쪽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한국의 분단 상황과 이들 작가 3명의 패널 작업 과정이 소개됐다.

   독일 주요 방송들은 아침부터 브란덴부르크 문 광장에 임시 스튜디오를 열고 찰리 검문소, 포츠다머 광장 등 역사적 장소들의 분위기를 시시각각 전하는 한편 20년 전 장벽 붕괴 당시의 자료 화면을 통해 당시의 환희와 감격을 되새겼다.

   ◇ 메르켈 "통일 아직 불완전" = 이번 행사를 주관한 메르켈 총리는 아침부터 바쁜 하루를 보냈다.

   메르켈 총리는 아침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과 함께 1989년 당시 동베를린 시위의 중심지였던 겟세마네 교회에서 열린 기념 예배에 참석한 데 이어 베를린 장벽의 소위 '죽음의 띠' 자리에 세워진 '화해의 예배당'에서 분단의 비극을 되새겼다. 그녀는 또 고르바초프, 바웬사, 시민운동가 등과 함께 당시 동독 주민들이 처음으로 자유롭게 서베를린으로 향했던 보른홀머 다리를 함께 걸으며 당시의 환희를 되돌아 봤다.

   메르켈 총리는 많은 시민들이 함께 다리를 건너며 '고르비'를 연호하는 가운데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결정적 공헌을 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에게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구 동독에서 자란 메르켈 총리는 또 공영 ARD 방송에 출연, 장벽이 붕괴될 당시 "우리 모두 매우 기뻐 말을 잃었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그러나 구 동독 지역의 실업률이 구 서독 지역의 2배에 이르는 등 "독일 통일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면서 "우리가 동등한 삶의 질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