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정진오기자]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언제나 그렇듯 힘없는 백성이다. 여몽전쟁의 참화 역시 고스란히 고려 백성들의 몫이었다. 권력층은 그러나 백성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었다.
13세기 중반을 관통한 여몽전쟁의 피해상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연구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전쟁 상황과 고려 백성들의 아픔을 시대순으로 손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사료는 조선 초기에 쓴 '고려사절요'가 대표적이다.
몽고의 본격 침략이 이뤄진 1231년(고종 18년)부터 삼별초가 진압된 1273년(원종 14년)까지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당시 전쟁의 참혹함이 어느 정도로 극심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그때도 이상기후가 잦았고, 갑자기 많은 사람이 몰려든 전시수도 강화엔 전염병도 만연했다. 고려의 백성들은 몽고군에만 피해를 당한 게 아니었다. 고려 정부군으로부터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수탈에 시달려야 했고, 죽임을 당했다.
관료들의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는 끝이 없었다. 백성들이 정권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고려는 몽고에 무릎을 꿇었다. 그 피해 역시 백성들이 떠안아야 했다. 고려 전기에 쌓았던 찬란한 문화유산도 사라졌다. 몽고군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를 통해 여몽전쟁의 피해상황이 어떠했는지 들여다봤다.
■ 최대 피해자는 백성
전쟁이 터지자마자 나온 첫 민간인 집단희생 기록은 고려군에 의한 것이었다. '판관 이희적이 성중(城中)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넣고 불을 지르고, 장정을 거느리고 자문(스스로 목을 찌름)하여 죽으니, 몽고 사람이 드디어 그 성을 도륙하였다.'(1231년 7월) 이는 몽고군에게 능욕과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계백장군처럼 말이다.
몽고군은 사람은 물론이고 닭이나 개까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잔혹했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몽고군의 싸움 방법과 잔인함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몽고군은 고려 전역을 누비면서 '싹쓸이 전법'으로 백성들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했다. '평주에서… 그 성을 도륙하여 계견(鷄犬)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싹쓸었다.'(1231년 11월) '몽고 군사가 광주, 충주, 청주 등지로 향하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1231년 12월) 1232년 정월 기사에 보면 백성들이 몽고군의 잔혹함이 무서워 몽고군을 죽이려는 고려군 장수를 사로잡기도 한다. 잘못되면 평주처럼 몰살당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여몽전쟁의 피해가 가장 컸던 해는 전쟁이 터지고 20년이 지난 1251년이다. '이 해에 몽고 군사에게 포로된 남녀가 무려 20만6천800여 명이나 되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몽고군이) 거쳐 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 군사의 난이 있은 뒤로 이보다 심한 때는 없었다'고 한다. 전투의 크고 작은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 전쟁이 무려 40년 넘게 지속됐다. 그 피해 정도를 가늠케 하고도 남는다.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었다
1247년 8월에는 겨울에 수달을 잡는다고 들어왔던 400여 명의 몽고인들이 산골벽촌을 뒤져 난을 피해 숨어 있던 백성을 모두 잡아가고 약탈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몽고인이 집단으로 들어올 때 강화(講和)했다는 이유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국가가 납치를 방조한 것이다.
몽고군은 산간벽지는 물론이고 외딴 섬 작은 굴에 숨은 백성들까지 추격했다. 1258년 8월 기사에는 현대전의 특수부대 투입방식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등장한다. '몽고병이 서해도의 가수굴과 양파혈을 쳐서 모두 항복하였다. 양파혈에는 상·중·하의 3구멍이 있는데, 몽고 군사가 산 위로부터 갑옷 입은 군사를 윗 구멍의 입구에 달아 내리었다. 창과 도끼가 모두 들어갈 수 없었다. 풀을 불살라 구멍 가운데에 던졌다 ….'
몽고군은 고려의 백성을 납치해 세계 각지의 전쟁터에 '방패막이'로 내몰았을 것이다.
■ 이상기후까지 극심
'4월에 우박이 크기가 밤만하여 새·까치들이 맞아 죽기도 하였다.'(1236년) '2월에 수은(水銀)이 비처럼 내렸다.'(1256년) '해 가운데에 검은 점이 있었다. 크기가 계란만 했는데, 이튿날에는 사람의 모양같았다.'(1258년) 백성들은 또 지진이나 가뭄, 장마의 피해도 자주 겪었다. 전쟁의 직접 피해도 견디기 어려운 마당에 갖은 자연재해까지 괴롭힌 것이다.
■ 백성에게 잔혹하고, 몽고에는 빌붙은 정권
몽고군이 아니라 고려의 관료와 정부군도 백성들에게는 '적'이었다. 최씨 무신 정권은 백성의 목숨을 헌신짝 여기듯 했다. 반대파를 강이나 바다에 던져 죽였다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직책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도 성행했고, 이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가렴주구로 이어졌다. 하지만 왕족과 정권은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몽고 정부에는 온갖 진귀한 공물을 받쳤다. 모두 백성들에게서 빼앗은 것들이었다.
■ 백성, 나라를 버리다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뭉치던 백성들은 아예 몽고군에 합류하는 양상으로 변하기도 한다.
백성들이 고려를 버리고 몽고를 택한 것이다. 지방정부의 우두머리가 휘하 백성을 데리고 집단으로 항복하는 장면은 전쟁이 20여 년이나 지속된 1253년 이후 자주 나타난다.
'용진현 사람 조휘와 정주 사람 탁청 등이 삭방도(강원도) 등주·문주 여러 성 사람과 꾀를 합하여 몽고병을 이끌고, … 고성을 쳐서….' '여러 성의 반민(叛民)들이 관인(官人)이라 자칭하고 몽고 사람을 인도하여 와서 한계성(寒溪城)을 쳤다.'
고려는 이미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안팎으로 버틸 수 없었던 고려 왕실은 1270년 수도를 강화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고, 몽고 정부에 항복했다.
※ 몽고약탈·권력층 착취 '이중고'… 전국서 농민·천민 봉기 잇따라
[경인일보=목동훈기자]여몽항쟁 때 고려 백성들의 피해는 매우 컸다. 그러나 고려 백성들의 피해가 여몽항쟁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여몽항쟁 전, 농민·천민들의 반항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 그 근거다. 당시 고려의 백성들은 지배층(무신정권)의 가혹한 착취와 수탈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픽 참조

명종 16년 7월 진주수령 김광윤과 안동수령 이광실이 가혹하게 재물을 거둬들여 백성들이 반역을 모의했고, 명종 20년에는 동경(경주)에서 부사 주유저가 농민봉기군을 습격하다가 반격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최충헌은 강력한 사병조직과 교정도감 운영으로 독재 체계를 구축한다. 최씨 정권은 대몽전에서 무력함을 드러냈고, '강화도 천도'로 정권을 유지하게 된다. 어찌 보면 몽고의 침입이 '최씨 정권 장기화'의 계기가 된 셈이다. 고려 백성들의 피해는 '지배층의 가혹한 수취'에서 '몽고군의 약탈'로 이어진다.
고려의 백성들은 여몽항쟁이 끝난 후에도 여·몽의 수취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몽고는 처녀를 징발해 보낼 것을 고려에 요구했고, 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조혼 풍습과 일부다처제가 생겼다고 한다.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에는 고려의 전선(戰船), 사공, 군사, 군량 등이 동원됐다. 고려에 대한 몽고의 수탈이 가중된 시기였다.
하지만 최씨 정권의 호화사치 생활은 여몽항쟁 시기와 그 후에도 계속됐다.
1229년 최우는 이웃집 수백호를 강제로 철거해 격구장을 만들었다. 또 며칠 동안 격구를 구경하면서 잔치판을 벌이기도 했다.
1245년 최우의 호화사치는 극에 달한다. 고려사절요(고종 32년 5월)를 보면 '잔치하였는데, 문수 채화로 장식하고 판면을 은 단추와 자개로 꾸미었다. 4개의 큰 분에 각각 얼음 봉우리를 담고… 팔방상 공인 1천350여명이 모두 호화롭게 단장하고 뜰에 들어와 풍악을 연주하니… 팔방상에게는 각각 백은 3근씩을 주고, 영관과 양부의 기녀와 광대에게도 각각 금백을 주니, 그 비용이 거만이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겨울 백성을 동원해 캔 얼음을 자신들의 잔치 등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 '고려사절요' 기록된 강화도 백성들의 피폐한 삶
궁궐 등 토목공사로 강제노역 '신음'… 최우 서자들, 수탈·부녀자 강간 횡포
[경인일보=임승재기자]권력자 최우는 고종 19년(1232년) 6월 16일 강화도를 새 도읍으로 정하고 군을 현지에 파견한다. 강화천도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고종 21년(1234년) 정월 고려사절요 기록을 보면 궁궐과 관아 등을 짓는 각종 건축·토목공사에는 대부분 전국 각지에서 징발된 백성들이 투입됐다. 그해 이런 기록도 있다.
'최우가 제 집을 짓는데, 도방(都房)과 사령군(四領軍)을 모두 부역시켜 배로 옛 서울 송도의 재목을 실어오고, 또 소나무·잣나무들을 실어다 집의 동산에 심은 것이 많았다. 때문에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다. 그 원림이 넓기가 무려 수십 리였다.'

최씨 정권의 수탈은 강화도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최우의 서자인 만종과 만전이 권세를 이용해 남의 아내를 강간하고 백성들이 거둔 곡식을 빼앗는 등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는 고종 26년(1239년) 고려사절요 기록을 보면 당시 지배층의 횡포가 어느 수준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식량난은 말할 것도 없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가에서는 대형 화재도 자주 발생한다. 수백, 수천 호의 집이 불에 탔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 곳곳에 남아있다.
민가의 경우 고려 정부가 도읍을 강화도로 급박하게 옮기면서 인구와 가옥이 밀집돼 화재 피해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백, 수천 호의 집이 화염에 휩싸이고, 또 그런 대형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백성들에게는 분명 엄청난 재앙이었다.
식수 부족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류중현 강화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은 강화산성 북문 근처에 있는 '오읍약수터'에서 당시 가뭄과 식수난에 얽힌 설화를 소개했다.
류 소장은 "고종이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생할 때 북산에 올라 기우제를 올리니, 바위 위로 벼락이 떨어져 그곳에 샘이 솟았다는 것인데, 하늘과 땅이 감동하고, 고종과 백성 그리고 실향민이 '이제 살았구나' 하며 울었다고 해서 오읍(五泣)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