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바다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고지 먼 빛이 더욱 좋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춘사' 중에서>
![]() | ||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서기 1636년 해남에 살던 한 선비는 의병을 일으켜 배를 타고 강화로 떠났다.
강화로 가던 중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조선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뱃길을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제주도로 가지 않았다.
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보길도라는 작은 섬의 매력에 반해 정착했기 때문이다. 보길도에 정착한 선비는 바로 조선 중기 끊이지 않는 당파 싸움 속에 꼿꼿이 외로운 선비의 길을 걸었던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에 윤선도의 나이는 쉰 살이었다.
■ 윤선도의 섬 '보길도' 가는 길
보길도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해남 땅끝마을 항구에서 출발해 보길도 청산항으로 가는 방법과 완도 화홍포항에서 배를 타고 노화도 동천항으로 이동해 셔틀버스로 보길도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노화도와 보길도는 별개의 섬이지만 현재 보길대교가 놓여져 차량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두 가지 방법 중 땅끝마을을 거쳐서 가는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10여년 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방문했던 추억을 되새겨 보고 싶어서였다.
땅끝마을은 전망대가 새로 만들어져 있었고 음식점이 예전보다 조금 늘어난 듯해 보였지만 십여년 전과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한 바퀴 휘 둘러본 후 배에 올랐다.
땅끝에서 보길도까지는 1시간가량 걸렸는데 가는 동안 최근 이 일대 특산품으로 자리잡은 전복 양식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어민들을 볼 수 있었다.
넙도를 지나자 이내 보길대교가 눈에 들어왔고 곧 선장이 하선하라는 방송이 들려 왔다.
보길도는 인구 2천800여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그런 까닭에 대중교통 또한 발달해 있지 않다. 매 시간 노화도와 보길도를 오고 가는 순환버스가 주요 문화재 주변을 오간다.
하지만 여행객들 대부분은 보길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기 위해 도보로 윤선도와 관련한 다양한 문화재를 둘러보거나 자전거 하이킹을 통해 섬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긴다.
![]() | ||
▲ 한양을 떠나 보길도에 정착한 윤선도는 동천석실을 짓고 차와 책을 가까이 했다. |
■ 윤선도의 흔적을 찾아 쉬면서 걷다
청별항에 내리자마자 이정표를 따라 세연정(洗然亭)으로 향했다.
걸어서 가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세연정까지 가는 길은 도보 여행객들을 위해 도로가에 나무로 예쁘게 길이 나 있다. 또 나무로 만든 길가에는 오래된 동백나무와 그늘을 드리워 주는 활엽수들로 인해서 햇살을 피하며 걷기에 좋았다.
15분쯤 걸었을 때 윤선도가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지는 세연정이 나타났다
세연정은 주변 경관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해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세연정 바로 앞에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 주는 세연지, 그 주변으로 동백나무와 소나무를 비롯한 상록수가 녹음을 드리우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물을 담아 두기 위해 설치해 놓은 판석보에 세연지에서 넘친 물이 흘러 마치 폭포처럼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길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신 세연지 위에 피어 있는 연꽃을 보며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 | ||
세연정에서 여행의 지친 마음을 달랜 후 다시 걸음을 섬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시골 마을 길을 걸으며 어느 농가의 집 곁에 매여 있는 소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체험학습을 위해 계곡 곁으로 나온 유치원 어린이들의 뛰어노는 모습을 감상하며 도보 여행의 무료함을 달랬다.
그리고 10여분간 산길을 올랐을 때 윤선도가 차를 마시며 책을 보았다고 전해지는 동천석실(洞天石室)에 도착했다.
동천석실은 한 칸짜리 작은 정자다. 정자에 올라서면 낙서재(樂書齋)와 적자봉을 비롯한 부용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에 잡힐 것 같은 모습의 낙서재는 윤선도가 기거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그 아래에는 윤선도가 자녀들이 공부하며 머물 수 있는 곡수당(曲水堂)을 지었다.
현재 우리가 여행길에서 만나게 되는 낙서재와 곡수당은 복원된 것들이다.
윤선도는 낙서재를 비롯한 보길도에 은거하며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걸작을 남겼다. 낙서재에서 8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둘 때까지 세연정, 동천석실, 곡수당, 무민당, 정성암 등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지으며 자신만의 무릉도원을 꿈꾼다.
/김종화기자
※ 취재 협조:다도해국립공원관리공단·완도군청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