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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추추황(庭菊秋秋黃) 뜰의 국화는 해마다 노란 꽃인데 / 자모년년백(慈母年年白) 어머님의 머리는 해마다 희어지네 / 세세년년화상사(歲歲年年花相似) 해마다 꽃은 같은 꽃이건만 / 년년세세인부동(年年歲歲人不同) 해마다 사람 얼굴은 같지 아니 하구나…."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세월과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한 중국 당(唐)나라 때 유정지(劉廷芝)가 지은 시〈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 '흰머리를 슬퍼하는 늙은이를 대신하여'〉의 한 구절이 송곳처럼 마음을 찌른다. 그런데 이 명시의 작시(作詩) 배경에는 사연이 많다.
어느 백화만발(百花滿發)한 봄날 유정지가 시상을 가다듬던 중 '금년에 꽃이 질 때 안색(顔色)이 변하니, 내년 다시 꽃필 때는 누가 있으랴' 하는 시구(詩句)가 떠올랐다. 마음에 들지 않아 망설이던 중 '해마다 해마다 꽃은 같은 꽃인데, 해마다 해마다 사람은 다르네'. 이 시구가 마음에 들어 앞의 시구를 써 한편의 시를 지었는데 바로 이 시다.
<당재자전(唐才子傳)> 에 따르면, 당나라 초기의 시인이며 유정지의 외삼촌인 송지문(宋之問)이 이 구절을 보고는 절창(絶唱)이라 탄복하며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해 잠시 허락하였다가 거절하자, 화가 난 송지문이 하인을 시켜 조카를 흙 주머니로 압살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30세도 안된 젊은 유정지의 비극이 이 아름다운 시구에 숨어 있다.
수은등에 비치는 벚꽃 이파리들이 달빛을 머금었다가 하롱하롱 낙화(落花)하는 모습을 보며 상념에 젖는다. 이 봄이 지나가면 그만큼 내 얼굴도 늙어갈 것이다. 해마다 새로 피는 꽃의 모양은 같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달라진다. 내년에도 꽃은 피겠지만 누가 그 때까지 살아남아 그 꽃을 볼 수 있다고 장담하겠는가? 해마다 피는 꽃은 같으나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같지 않은 게 세상사다. 해마다 꽃은 비슷할 터인데, 올해도 내년에도, 또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지금처럼 아름답게 필 터인즉 자연의 변함 없는 모습은 나를 다시한번 돌아보게 한다. 덧없는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는 이 시구는 부박(浮薄)한 세월의 무정함을 돋보이게 한다. 속절없이 무정세월은 흘러가는데 조지훈의 '낙화(落花)'는 가는 세월을 통곡하게 한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화장하고 꽃 구경 가는 처녀의 모습은 예뻐보이지만 해골의 둔갑이라고 비뚤어진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해골 위를 치장하고 꽃구경이로다"는 삶의 예찬으로 보면 이형기 시인의 '낙화'는 또 다른 감상을 자아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 격정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 머지않아 열매 맺는 / 가을을 향하여 /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떨어지는 꽃에도 정이 있어 낙화유정(落花有情)이라 했던가? '내 청춘도 날 버리고 떠났다'는 사철가 가락이 마음을 후비고 지나가는 것은 나만의 감상일까. 가는 세월만큼 우리의 나이도 더해지니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처럼 낙화유수(落花流水)신세가 될까 걱정된다. 가는 세월이 조금은 야속하기도 하지만 봄이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황량한 들판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도 봄이 화사하게 피어나길 바라며….당재자전(唐才子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