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이 결혼 후에도 함께 하기위해
아파트 대신 단독주택 짓기로 결심
베테랑 정승이 건축사에 설계 의뢰
건축사, 조씨와 인생을 공유하다
오래 만난 벗처럼 집 관련해 대화꽃
조씨부부 철학 이해 후 설계에 반영
좁은 공간 활용해 맞춤형 주택 지어
가족이 어우러진 '러브 하우스'
지하에 창고 아닌 이벤트 공간 조성
곳곳의 창문으로 일상 살필 수 있어
하늘정원 텃밭 가꾸며 행복도 '쑥쑥'
공간만 존재하는 집이 있다. 여러 개의 방과 주방 그리고 거실. 의례적인 공간의 나열만 존재하는 곳.
모든 공간이 연결돼 있지만 완전히 단절됐고, 단절돼 있지만 사적인 생활은 보장받을 수 없는 곳.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형태는 대개 그런 곳이다.
우리가 사는 집이 ○○아파트 ○동 ○○호로밖에 불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른다.
공간과 사람이 찾은 두번째 집은 '조성철의 집'이다. 조성철은 이 집을 지은 건축주다. 거창한 제목 대신, 이름을 붙인 건 조성철(62)·장문옥(57) 부부가 '평생 살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줄곧 아파트에서 살아온 조성철씨가 단독주택을 짓기로 마음먹은 건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다.
조씨는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아들이 머지않아 결혼을 하게 될텐데, 그 아이들과 함께 울타리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난 뒤, 살고 있던 아파트를 돌아보니 섣불리 꺼낼 수 없는 생각임을 깨달았다. 함께 하려면 아들부부만의 공간이 있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가족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했다. 어린 시절, 대가족을 경험하며 살아온 그가 주택으로 돌아온 이유다.

하지만 조성철의 집에는 그가 추구했던 모든 공간이 녹아있다. 이는 전적으로 철학과 열정의 합이 잘 맞는 정승이 건축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 건축사는 유한건축설계사무소(U-HAUS)를 이끌며 주로 단독주택을 설계하는데 경기도 건축문화상을 비롯해 유수의 건축상을 수상한 베테랑 건축가다.
그는 "건축주 스스로, 내가 살 집이란 생각을 갖는 순간 건축은 시작된다"며 운을 뗐다.
투기가 아닌 주거의 개념으로 집이 가진 가치를 이해하는 건축주를 만났을때, 건축사의 설계는 비로소 빛을 발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조성철의 집도 마찬가지다. 설계의뢰를 받은 직후부터 정 건축사는 조씨부부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집을 매개로 그들은 오래 만난 벗처럼 인생을 공유했다. 정 건축사는 "건축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집을 설계하다보면 그동안 건축주가 살아오면서 느낀 결핍을 공간으로 메워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정 건축사는 "협소한 공간 탓에 1층에 주방과 거실만을 두는 대신 1층 전체를 큰 창으로 둘러싸 땅이 보이는 바깥 풍경과의 연결성을 강조했다"며 "집 내부와 외부가 하나의 풍경이 되는 구조"라고 소개했다.
아들과 함께 살고 싶은 중년 부부에게 아들과 부부가 분리되는 사적인 공간은 필수다. 2층을 전부 아들과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공간으로 내준 대신, 부부는 1.5층이란 신공간을 만들었다. 1층과 2층 사이, 방 하나 들어가는 자투리 공간이지만, 햇살이 들어오는 미니 창이 길게 이어져 공간은 어느새 풍성해진다.
지하 1층은 가족이 중첩되는 곳이다. 조씨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남편의 서재와 아내의 공방, 온가족이 영화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오디오 룸이 한데 어우러져 함께 하면서도 각자의 공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 건축사는 이 공간을 '이벤트'라고 표현했다.
그는 "집의 재미를 더해 줄 수 있는 이벤트 공간은 집 밖만 맴도는 가족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며 "특히 좁은 면적일 때 이렇게 지하를 창고가 아닌, 이벤트 공간으로 활용하면 효과적"이라고 귀띔했다.
옥상에 펼쳐진 하늘 정원도 조성철의 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다. 하늘정원은 나만의 정원을 갖고 싶었던 장문옥씨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협소한 공간에 갖가지 채소와 꽃을 심을 수 있는 정원은 욕심내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하늘'이라는 정원이다. 비록 딛고 있는 땅은 한정됐지만, 누릴 수 있는 하늘은 무한대다. ㄷ자 형태의 옥상난간을 따라 화단을 조성했다. 시골집에서나 봄직한 넓은 평상을 정원 한가운데에 놓았다. 장씨는 "하늘 정원을 만들어 준건 정 건축사지만 그 안의 공간을 꾸미는 건 우리의 몫"이라며 "하나부터 열까지 손때 탄 내 집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개씩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미소를 지었다.

특히 거실의 양쪽을 감싸고 있는 큰 창은 하루 해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씨는 "거실 한쪽 창에서 뜨는 해를 지켜보다 반대편 거실 창에서 석양을 바라보면 하루하루에 감사하게 된다"면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자연의 풍만함을 만끽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덧붙여 정 건축사는 "공간마다 있는 창문은 꼭짓점"이라며 "꼭짓점을 따라 선을 이으면 하나의 도형이 되듯, 창문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면 각각의 공간에 있던 가족은 하나가 된다"고 설명했다. 거실에 앉아 아들방에 켜져 있는 환한 불을 바라보고, 퇴근하는 남편의 모습을 주방에서 지켜보는 가족을 연상하니 하나의 도형은 어느새 완성됐다.
좋은 집은 '3년쯤 지난 어느날 가만히 집 안 어딘가에 앉아 우리집이 이렇게 좋은 곳이었구나'를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정 건축사는 강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퇴색되는 ○동 ○○호와는 어딘가 거리가 멀다. 조성철의 집은 예술적 배경이 돼 줄 그럴듯한 자연환경이 없는 택지개발지구에 오로지 집이 가진 가치로만 승부하는 건축사와 열정을 가진 건축주가 빚어낸 또다른 작품이다.
글=공지영기자
사진=하태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