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중앙대 교수 |
5년간 함께 했지만…
얼굴은 모두 평범한 이웃 아저씨
그들에게 세상은 그저 방관자
관심과 대화로 공감대
가르침보다 배운게 더 많아
내 인생에 있어서 2009년 봄부터의 시간은 재소자들과 함께한 참으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재소자 교화사업에 내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이야.
춘천교도소와 춘천소년원은 지인의 소개로 두어 번 가서 특강을 했지만 영등포구치소, 안양교도소, 서울남부교도소(영등포교도소가 구로구 고척동으로 가면서 이름을 바꿨다)는 몇 달 계속해서 나가며 시 창작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열 명 남짓 되는 재소자와 둘러앉아 시에 대해, 문학에 대해, 인문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고 그들의 속내 이야기를 듣다 보면 2시간이 금방 지나가곤 했다. 우리는 각자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자식에 대해, 그리고 자식 된 도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교수'라는 직함은 그들과의 소통에 장애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수차례의 가출과 자살기도로 점철된 다소 엉뚱한(?) 시절을 보냈다는 성장 스토리를 들려주면 경계의 눈빛을 푸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고등학교 2개월 재학 후 중퇴라는 나의 이력이 대학교수라는 직함보다 훨씬 매력적인가 보았다.
내가 만난 재소자 중 가장 많은 범죄 유형이 마약사범과 아동성폭력범이었다. 전자로는 마약중독자, 마약제조업자, 마약운반책, 마약공급책이 있었다. 마약중독자로는 유흥업소 종사자가 많았고 마약제조업자와 운반책은 폭력조직과 관련된 자들이 많았다. 마약사범은 속성상 재범률이 높았다. 교도소에 있을 때야 다시는 마약을 하지 않으리라 단단히 결심을 하지만 출소하면 험한 사회에서 몸으로 구르다 순간적인 위안밖에 주지 않는 그 약의 유혹에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마약제조업자와 운반책은 한 건당 배당금이 엄청난 것이 문제였다. 들키면 옥살이를 하게 되지만 성공하면 몇 년 동안 먹고살 거금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약에 중독되는 것이야 그들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들이 이들 마약사범이다. 이들과의 만남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어느 날 누군가 내 시집을 읽었다며 내 시 속의 '황도 12궁'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왔다.
아들아, 네 머리는 둥근 이 지구를 닮았으니
황도 12궁을 머리에 이고 있는 거란다
손 뻗으면 달, 발 뻗으면 해
그런 마음으로 늘
새 천년의 먼동을 보며
너의 생을
지난 세기와는 다르게 열어가렴
―<황도를 지우다> 부분
내가 뭐라고 설명을 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명쾌한 설명은 아니었던 듯하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재소자가 손을 들기에 지명을 했다. 일어선 그가 "제가 설명을 좀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내심 얼씨구나 하고 "네, 말씀해 보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야말로 청산유수였고, 천문학자 뺨치는 수준이었다. 글씨도 참 잘 썼고, 미남자인 그가 마약중독자라는 것이 안타까웠다. 지금은 출소하여 건실한 한 명 사회인이 되어 마음잡고 살아가고 있기를 기원한다.
아동성폭력범들과의 만남은 이미 그들의 범죄 내용을 교도관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초긴장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여자아이들의 몸에만 상처를 낸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긴 그들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여자아이들의 부모형제는 한평생 또 얼마나 힘든 시간을 감내해야 할까. 일단 놀랍게도 10명의 아동성폭력범은 20대, 30대, 40대, 40대, 50대, 60대 등 나이가 다양했다. 70대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 모습은 조금치도 흉악범이 아니었다. 동네 산책을 하다가 만날 법한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들'이었다.
30대 한 젊은이의 경우는 사정이 딱했다. 아버지의 잔인한 폭력이야 어릴 때부터 다반사인지라 포기한 부분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몰인정은 세파보다 훨씬 차가웠다. 10개월을 잉태하여 낳은 자식이었지만 어머니는 남편의 학대와 무능력함에 지쳤는지 자식에게 정을 좀처럼 베풀지 못했던가 보다. 생활고에 짓눌려 산 어머니는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밥값을 못할 거면 나가 죽으라고 했다고 한다. 장애아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존재였던 것 같았다. 동생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으로 오빠는 험한 일을 하며 집 밖으로 떠돌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자식은 세상살이가 막막하고 팍팍한 법이다. 그가 자기 마음속에 세상에 대한 증오의 돌탑을 쌓고 있을 때, 세상 모든 사람은 방관자였다. 아니, 배움이 부족한 그를, 기술이 없는 그를, 욱하는 성미가 있는 그를 외면했다. 등을 돌렸다.
나는 눈빛이 맑은 그에게 관심과 배려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깥세상에 나가면 남을 위해 한번 살아보라고, 남한테 선물이란 것을 한번 해보라고, 남을 위해 '따뜻한 식탁'을 마련해주는 마음으로 일을 해보라고 했을 때 그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기억한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감사의 표시였고 공감의 표시였다. 무보수로 식당일을 하면서 악착같이 배웠다고 한다. 그럴게 익힌 기술로 스스로 식당을 열기까지의 인생 스토리는 인간 승리의 표본에 가까웠지만 그는 앞으로 몇 년을 더 교도소 감방 안에서 보내야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 출소 후 찾아오면 술 한잔 사주겠다고 했는데 찾아올지 모르겠다. 연락 주면 꼭 가서 당신 식당의 밥을 사먹겠다고 약속했다. 부디 자신의 저지른 죄는 진정으로 뉘우치고 형기를 마치기를 바란다.
작년부터는 법무부 사회복귀과에서 펴내고 있는 계간지 『새길』의 심사를 하고 있다. 전국 교도소와 구치소와 소년교도소에서 보내온 수필과 직원의 수기를 읽고 그중 좋은 작품을 골라내 심사평을 쓰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매호당 절반 이상을 탈락시켜야 하는 것이 고역이다. 10만 명 가까운 재소자 가운데 자기 나름대로 글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투고를 하니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읽다가 심사자인 내가 감동하여 혀를 차거나 장탄식을 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글을 쓴 장소가 바로 교도소의 감방이기 때문이다. 편편의 글이 다 기막힌 사연이다. 죄는 미워할지라도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심사할 때마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법무부 서울지방교정청 사회복귀과에서는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국한시켜 문예지 『꿈과 희망이 있는 교정』을 발간하고 있는데 나는 신앙수기와 독후감 부문 심사를 하였다. 수준이 정말 높아서 3명씩에게만 주는 상인데 내가 주최측이었다면 10명씩 최소한 20명한테 상을 주고 싶었다. 심사를 하면서 매번 느끼는 또 하나가 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재소자들의 지적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점이다. 대졸, 대학원 졸업자가 한 순간의 실수로, 혹은 그 좋은 머리를 나쁜 곳에 써 그곳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5년간 재소자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죄를 지었으면 진정으로 뉘우쳐야 한다는 것을, 약자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분노를 폭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사색이나 종교적 명상을 통해) 마음의 수양을 늘 해야 한다는 것을, 타인에게 마음으로라도 늘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승하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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