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세계를 넘어
최고 예술인들 만난다
천 화백은 여느 작품과 다른 화풍·낙관 남겨 '연구 가치'
예술인들 모여든 '동방살롱'서 가까워져
'핏자국'으로 등단 현실감 돋보여
'인천각' '들국화' 통해 사라진 유산·오염된 환경 안타까움 담아
소안(素眼) 최성연(崔聖淵·1914~2000)은 인천 출신 시조시인이자 향토사학자다. 최성연은 1955년 7월 동아일보 창간 35주년 기념 현상 문예작품 공모에 시조 '핏자국'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핏자국'은 한국전쟁 당시 전선의 어느 OP(Observation Post, 관측소)의 몸서리치는 전황(戰況)을 기록한 시조다.
산 마루 돌벼랑이/허옇게 바스러진//금성(金城) 남방전선(南方戰線)/이름 모를 골짜기에//몰박힌/포탄 구덩이/황내 상구 풍기다.//실개천 넘어서서/비탈길 접어들자//검붉은 핏자국이/음푹 고여 잦었는데//섬뜩히/지피는 외람(畏濫) 일레/온몸 사뭇 굳어들다.(하략)
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1896∼1989)은 심사평에서 "신생활감(新生活感)을 나타내려 한 노력이 현저하다"며 "시조는 어디까지나 시조여야 하겠지만 낡은 수법으로 답보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핏자국'을 당선작으로 하였으나, (최성연의) '살얼음' '물' '궂은비'도 그만 못한 작품은 결코 아니다"며 "모두 관념적인 유희보다 생생한 현실을 그려 내려 한 그 노력을 사주기로 했다"고 했다.
그해 12월 최성연은 시조집 '은어'(서울신문사)를 냈다. 이듬해 1월 동아일보에 '은어'를 소개하는 시조시인 월하(月河) 이태극(李泰極·1913~2003)의 글이 실렸다.
이태극은 "한 수 한 수가 심혼의 절규요, 자기생활을 통해 본 현세대의 움직임 아님이 없다"며 "소안은 곧 생활시인이라 보고 싶다. 그 작품 속에서 진실감과 직관적인 묘사안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아직까지도 우리 화단에 이야깃거리를 몰고 다니는 천경자 화백이 어떻게 시조집 '은어'의 장정을 맡게 됐을까.
최성연이 '은어' 후기에서 감사의 뜻을 표시한 김동근(金東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성연이 1954년 3월 '동방사진뉴스사'에 입사해 편집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김동근은 서울 명동에 동방살롱(동방문화회관)을 세운 동방사진문화사 사장이다.
김동근은 1953년 1월 동방사진문화사를 설립하고, 그해 9월 주간 '동방사진뉴스'를 발간했다. 그가 예술인들을 위해 1955년 8월 세운 동방살롱에는 천경자, '명동백작' 이봉구, 시인 조병화와 박인환, 화가 김환기 등이 살다시피 했다. 최성연과 천경자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성연은 1988년 두 번째 시조집 '갈매기도 사라졌는데'(교육문화출판사)를 냈는데, 이 책에는 서예가 우초(又樵) 장인식(張仁植·1927~1992)의 휘호가 실렸다. 공교롭게도 최성연과 가까이 지낸 이경성, 유희강, 장인식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역임했다.
서지(書誌) 연구자인 박대헌 '호산방서점' 대표는 "책에 '장정 천경자'로 표기돼 있다면, 천경자의 작품이 100% 맞다"고 했다. 또 "유명 화가들이 장정을 맡게 된 배경에는 저자 또는 저자 지인과의 친분 관계가 있다"며 "출판사에서 주선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했다.
천경자 화백은 자신의 이름과 작품 연도를 한자로 적는 것이 특징인데, 시조집 '은어'에는 유독 '경'이라는 한글 낙관(落款)이 선명하다. 전문가들도 천경자 화백의 한글 낙관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16일 인천의 도서관을 뒤져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 천경자 관련 책에 실린 그림을 모두 살폈지만, 한글 낙관은 보이지 않았다.
천경자 화백의 제자이자 '보리밭 화가'로 유명한 이숙자 씨에게도 '은어' 속 그림에 대해 물었지만, "천경자 선생의 그림 중에서 이런 작품 풍과 낙관은 처음 본다"는 답변이었다. 시조집 '은어'는 시조 그 본령을 넘어 천경자와 관련해서도 또 다른 연구 과제를 던진다고 할 수 있다.
오정포 산 허리 짬에/어리 저리 참호 파고//아람두리 나무통들/가로 세로 딩굴렀는데,//인천각/그 호화롭던 양옥 마저/심한 함포 맞고/폭삭 주져 앉다.//집 맴시 뛰어나고/쓸모 또한 큰 탓일가//모른채 석달 내내/고스란히 남겼다가//갑자기/십자 포격으로/수월하게 처부수다.//인민군 군관들이 은신처로 잘 못 알고//꾸역 꾸역 모였다가,/삼태기 쓴 꼴/됐다던가//어렵게/전쟁 겪고 세우더니,/끝내 전쟁 탓에/쓸어 지다.
1883년 일본의 인천항 개항으로 제물포 일대는 외국인들의 차지가 됐다. 조계지가 설정되면서 원주민인 인천사람은 변두리로 내몰리고, 서양식 건물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이 별장은 1919년 존스턴의 사망으로 독일인 소유가 됐다 일본인에게 2차례 매도됐다. 1936년 인천부(仁川府)가 매입해 '인천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여관·요정으로 활용하던 중 조선은 해방을 맞았고, 미군정시대 들어 이 건물은 미군 장교 숙소로 쓰였다.
8월의 첫 주말이던 지난 2일 자유공원을 찾았다. 과거 인천각이 있던 자리에는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다.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왕년 인천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던 인천각. 이제는 자유공원 인근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에 전시된 미니어처와 인터넷·책자에 실린 사진으로나 만날 수밖에 없다.
과거 인천각에서는 제물포 일대와 인천 앞바다 섬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배를 통해 제물포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인천각이었다고 한다. 지금 자유공원 광장에선 하버파크호텔, 중부경찰서, 파라다이스호텔, 월미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멀리 인천대교를 넘어 영종도도 시야에 닿는다.
한 두번 된서리에/잎은 모두 처졌어도//기쓰고 피어보는/연보라빛 들국화꽃//가으내/영근 소망인걸/어찌 지레 꺾이리까 (들국화1)
하도 볶기다 못해/산 마루도 깎였는데,//어찌 들국화는/철 따라 피어나노?//옛 모습/차마 잊이 못해/그 골짝에 피었다네. (들국화2)
최성연은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이 전쟁과 개발 등으로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들국화'를 썼다.
그가 '신동아' 1973년 3월호를 통해 발표한 '갈매기도 사라졌는데'는 인천항의 환경오염을 고발한 작품이다.
새하얀 갈매기떼/훨훨 떠돌다는//때때로 곤두박여/먹이도 쪼아가며//누백대(屢百代)/둥질 틀고서/새끼 치며 살던 포구//하 오래 겪다보니/짠물도 썩어들고//깃털을 더럽히는/체통쯤 잃을망정//옛정을/어쩌지 못해/눌러 앉아 살쟀더니,//치어랑 전어떼랑/모두 다 지레 죽고//허기져 처지는 나래/휘젓기도 힘겨운데//지겹게/깔린 오염(汚染) 일레/죽지못해 안갔나베
제4회 한국시조대상 수상자인 시조시인 정수자(57)씨는 "인천의 오염 상황을 갈매기에 빗대어 나타내지만 일찍부터 오염에 주목한 것이 인천에 대한 사랑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또 "감각적인 형상화를 꾀한 작품들은 동시대에도 고시조 투를 편하게 쓴 시인들과 크게 구별되는 개성으로, 보다 주지적인 시조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정수자씨는 최성연의 1952년 작품 '오디'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길가 덤불속에/때 아닌 웃음소리//입술 까만/사병(士兵) 서넛/희죽대며 내달리다//이쯤도/누에 치던 말(村)이던가/오디 꽤나 익었네(오디)
정수자씨는 "전쟁 중의 한 틈을 잡아 감각적으로 그린 수작"이라며 "시골의 간식이던 '오디'라는 작은 열매를 통해 누에 치던 마을의 전쟁 이전 삶을 슬쩍 일깨우는 수법은 작은 것에서 큰 것의 포착으로 전쟁의 참상을 환기한다"고 했다.
인천문인협회장을 지낸 김학균 시인은 "최성연 선생은 술을 안 마셔도 술자리를 끝까지 지킬 정도로 정이 많은 분이었다"며 "중구에 있던 '동보성'(중국집)에서 두 번째 시조집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그때는 시조시인 이태극 선생도 참석하셨다"고 했다.
또 "1994년 간석오거리 갤럭시 호텔에서 팔순잔치가 열렸을 때는 문단 후배로는 나와 이석인, 손설향 등 3명만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글 = 목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