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죽은 다음날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답문은 오지 않았다 

비로소 그녀의 죽음을 실감했다


연락을 주고받았던 그녀는 한사람이 아니었다
플라나리아처럼 무수히 증식한 그녀
'그녀는 누구인가'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저녁 일곱 시가 넘은 시각 그녀의 차는 도로 위에서 전복되었다. 그가 그녀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그의 휴대폰을 통해 그녀의 차가 부서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왔다. 그는 차바퀴가 빗길에 미끄러지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피가 길바닥으로 튀기는 소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마지막에는 그의 귀 속 가득히 비 오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의 귀는 마치 하수구멍처럼 빗소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마지막 순간 휴대폰 전원을 끄지 못한 모양이었다. 

경찰은 사고현장에서 수거한 그녀의 휴대폰을 그에게 넘겼다. 그녀의 휴대폰에 찍힌 마지막 번호는 그의 것이었다. 그녀의 휴대폰 통화 목록에 무수히 새겨져 있는 그의 번호들, 그리고 그가 그녀와 나누었던 일상적인 대화들과 고백들까지. 그들이 그녀의 죽음을 핑계로 그 모든 걸 엿보았을 것이란 생각에 그는 불쾌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을 뿐.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이제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터널을 지나가는 지하철 속에서 그는 검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믿기지 않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집에 돌아온 그는 책상 위에 그녀의 휴대폰을 내려놓고 바라보았다. 전원이 꺼져 있는 휴대폰은 투명한 비닐 팩에 싸여 있었다. 자음과 모음들이 새겨진 휴대폰 버튼, 그녀는 그것을 두드려 그에게 무수히 많은 말을 했었다. 잘 잤느냐고, 식사는 했느냐고, 보고 싶다고, 때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행적이 의심스럽다고. 그 모든 메시지가 그녀의 손끝에서 완성되었을 터였다. 수학 교사인 그녀는 문장부호까지 정확하게 새겨 넣은 단정한 문장으로 그에게 말을 걸어오곤 했었다. 그녀의 메시지를 읽다보면 그는 마치 그녀가 자신의 귀에 대고 또박또박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좋은 아침이야.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는 지금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끝으로 비닐에 싸여 있는 그녀의 휴대폰을 쓸어내렸다.
*

그녀가 죽은 다음날이었다. 그는 과학 실험실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플라나리아는 몸을 반으로 잘라도 정말 다시 자라나요? 누군가 그에게 질문을 했다. 그는 질문한 학생을 찾기 위해 두리번댔다. 실험실은 창마다 암막 커튼이 내려져 있어 어두웠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학생들은 저마다 해부용 메스를 들고 있었다. 그 또한 손에 메스를 들고 있었다. 질문한 학생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는 적당히 허공의 한 지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요. 플라나리아는 재생력이 강해 잘린 몸은 다시 자라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접안렌즈에 눈을 가져다 댔다. 확대되어 보이는 플라나리아의 몸에 메스 날을 가져다 댔다. 플라나리아의 몸이 꿈틀거렸으나 그는 곧 무심하게 메스 날을 그어 그것을 반으로 잘랐다. 생물 교사가 된 뒤 수없이 반복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어쩐지 플라나리아는 더 이상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기분이 드는 건 그녀로부터 더 이상 오지 않는 전화연락 때문인지도 몰랐다.

첫 교시 수업을 시작할 무렵이면 그녀로부터 연락이 오곤 했었다. 지루하다. 당신은 뭐 하는 중이야? 그러나 이제는 휴대폰이 잠잠했다. 그는 실험용 가운 주머니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휴대폰이 만져졌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부옇게 흐려져 있는 액정 화면에 그의 안경 낀 얼굴이 비쳤다. 그는 평소처럼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 보았다. 보고 싶어, 지금. 학생들이 플라나리아 몸을 가르는 동안에도 그는 그녀로부터의 답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잠시 뒤 그의 가운 주머니 속에서 진동음이 가볍게 울렸다. 그는 놀란 마음으로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들어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그녀에게 온 문자일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고객님의 휴대폰 전원이 꺼져 있어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의 눈빛은 잘린 플라나리아 단면처럼 서늘해졌다. 역시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에게 답문은 오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그녀의 죽음을 실감했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어쩌면 그녀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와의 연결이 끝났다는 데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는 그녀와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그와 그녀의 학교는 1호선 끝과 끝 지점에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도 근무를 마치고 나면, 1호선 중심인 서울역에서 만나 늦은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헤어지곤 했었다. 그러나 점차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데이트를 한 다음날이면 둘 다 몸이 무거웠다. 그들은 아침 8시까지 출근하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잠은 부족했고, 수업 이외의 잡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고3 담임이었기에 추천서나 자기소개서를 첨삭하는 업무에도 치이고 있었다. 그렇게 피곤한 상태였기에 그들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다 하더라도 무표정하게 앉아 있곤 했다. 맥주를 마시면 한두 잔에도 쉽게 몸이 기울었고,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자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지나치게 피곤했고, 지쳐 있었고, 서로를 끌어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는 횟수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학교가 끝나고 난 뒤에는 각자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들의 만남은 충분히 이어질 수 있었다. 휴대폰이 있기 때문이었다. 휴대폰이 있기에 굳이 그 왕복 두 시간 거리의 노선을 따라 지하철에 몸을 실을 필요가 없었다. 붐비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혀가면서까지 기어이 서울역으로 향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그들은 1호선 끝과 끝에 위치한 각자의 방에서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휴대폰 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관계를 맺는 것 또한 폰섹스로 대체할 수 있었다. 지금 무얼 입고 있어? 당신의 손이 내 손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아봐. 그녀에게 이런 말을 속삭이며 그는 쉽게 흥분했다. 그녀 또한 거짓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리얼하게 신음했다. 그들은 통화만으로도 충분히 몸을 섞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만나서 몸을 부대낄 때보다 더욱 편리하고 쉽게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자신만의 성적 환상 속에서 그녀는 실제보다 더욱 육감적이었고, 유연했다. 그 또한 실제보다 더욱 그녀를 노련하게 리드해 나갈 수 있었다. 얼굴을 보고는 부끄러워서 할 수 없는 말도 그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절정에 다다르는 지점이 엇갈린다 하더라도 서로에게 들킬 염려 따위는 없었다. 그는 적당히 그녀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연기를 해주었다. 그랬기에 굳이 만나지 않더라도 그들은 아쉽지 않았다.
*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와의 통화가 불가능했다. 그는 그동안 혼자 살아온 방을 새삼스럽다는 듯이 둘러보았다. 방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가구들과 전기제품은 모두 싱글을 위해 소형으로 제작된 것들이었다. 조립용 책걸상 세트가 박스에 담겨 배달되어 왔던 날, 그는 방안에 웅크려 앉아 맨손으로 그것을 조립했었다. 그는 설명서에 적혀 있는 대로 부품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 나사를 조여 나갔다. 그것들이 모양새를 갖추어 나가는 순간에도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웅크려 앉아 의자를 조립하는 그의 수그린 뒷목을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그는 잘 깨닫지 못했었다. 외로운 적이 없었다. 그가 연락하면 언제라도 그녀가 대답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그는 책상 스탠드 불빛 아래 그녀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집요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와의 다정했던 통화를 떠올리다가,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휴대폰 전원을 눌렀다. 푸른 불빛이 뿜어져 나오며 휴대폰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그는 그녀의 멎어버렸던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바짝 귀를 세우고 휴대폰이 다시 작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등이 앞으로 수그러들었다. 긴장한 것처럼. 누군가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해 몸을 바짝 숙인 것처럼.

잠시 뒤 전원이 켜진 그녀의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동시에 전원이 꺼져있어 막혀 있던 문자가 하나하나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 당신. 그 날 아침 수업시간에 그가 그녀에게 보냈던 문자였다. 그 문자를 시작으로 해서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카드사나,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문자가 전송되어 왔다. 그는 그녀의 죽음 뒤에 온 문자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다가 어느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오해한 거야. 나는 정말 오랜만에 메신저에 접속했다가 그 여자와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누었던 것뿐이라고. 정말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지 모르겠어. 이런 일로 나를 괴롭힐 거면, 헤어져. 그 문자는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를 하기 직전, 그가 보냈던 거였다.

그 때 그들은 심하게 다투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동창회에서 만난 옛 여자 친구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걸 그녀가 눈치 챈 것이었다. 그는 실수로 여자와의 대화방을 오픈해 두었고, 그 때 그녀가 그들의 대화방에 접속해 들어왔다. 그들 셋은 우연히 메신저에서 모이게 되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그녀가 불쑥 말을 했을 때, 그는 섬뜩했다. 그녀는 그 한마디를 던지고 휙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듯 대화방에서 나갔다. 그는 당황해서 그녀의 폰으로 급하게 사과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 실수였어. 정말 다른 뜻은 없었다고. 내 말을 믿어줘. 그러나 그녀에게는 답이 없었다. 그는 혼자 사과 문자를 보내다가 변명을 늘어놓았고, 그러다가 격해져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 헤어져. 이제 그만 만나. 불쑥 그녀에게 그런 문자가 왔고, 그는 홧김에 알겠다고 답했다. 그래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받았고, 그녀는 차를 몰고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그 마지막 문자들로 인해서 어쩐지 그녀가 죽기 직전의 시간으로 되돌아와 있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그 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 책상 의자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때도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이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문자를 작성하던 중이었다. 그는 그 때 느꼈던 분노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덕분에 그녀를 잃은 상실감으로 차갑게 식어있던 그의 몸에 체온이 올라갔다. 그 때문일까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의 휴대폰이 다시 켜진 그 순간부터.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휴대폰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ㅂ,ㅗ,ㄱ,ㅗ,ㅅ,ㅣ,ㅍ,ㅇ,ㅓ. 잠시 뒤 기다렸다는 듯 그의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이 놓여 있는 침대 머리맡을 향해 다가갔다. 한 통의 문자가 왔다는 표시로, 노란 편지 봉투 모양이 액정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번호였다. 그러나 그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파르르 눈꺼풀이 떨리고, 뜨거운 날숨이 뱉어졌다. 정말 그녀에게 문자가 온 것 같았다. 아니 실제 그녀에게 문자가 온 것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마치 오랜만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듯이, 조심스럽게. 그는 호흡이 가빠졌다. 보고 싶어. 22:09 문자를 확인한 그는 입 꼬리가 절로 당겨져 올라갔다. 입술 끝이 반가움으로 살짝 떨렸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문자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는 휴대폰으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했다. Man's time 이라는, 요즘 유행하는 사이트였다. 이름 그대로 사람들의 시간이 거래 대상이었다. 무엇이든 가능했다. 밤새 이인용 게임을 함께 해줄 파트너를 구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편 대신 아이와 놀아주고 여행을 가줄 사람을 구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다이어트로 식욕을 억제해야 하는 게 괴로운 어떤 여자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먹고 싶은걸 먹어줄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그녀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줄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녀의 연락이었다. 그녀로부터 계속해서 연락이 온다면 그는 더 이상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그녀가 살아 있는 느낌이 들 것도 같았다. 아니, 그의 세상에서는 여전히 그녀가 살아있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Man's time 사이트에 구인공고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죽은 그녀를 대행해줄 그녀를 구합니다. 그녀의 휴대폰을 맡아주세요. 그녀가 되어 내게 말을 걸어 주시면 된답니다. 잘 지내고 있어? 지금 뭐해? 비가 내리네, 우산은 있고? 이런 문자를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문자를 하나 보내줄 때마다 사례금은 올라갑니다. 대신 철저하게 그녀가 되어주세요. 조건은 하나. 그녀와 비슷한 말투를 구사하는 여성분이면 됩니다. 그녀와 얼굴이 닮을 필요도 없고, 그녀의 신체 사이즈와 같을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당신의 체온이나 생김새 그리고 냄새 따위는 저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그녀처럼 신중하고 따뜻한 말투를 구사하는 또 다른 그녀가 필요할 뿐입니다. 

추신. 유행어나 이모티콘 사용은 자제 바람.

227,228,229……. 그의 글 조회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밤새 그의 글 아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담벼락을 따라 하나 둘씩 여자들이 늘어서기 시작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장면 안에는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 모여든 여자들이 있었고, 여자들의 얼굴은 어둑한 불빛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여자들에게서 아무런 체취도, 아무런 체온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여자들을 하나씩 일별하며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 때마다 그가 주의 깊게 듣는 건 여자들의 말투였다. 어둠 속에서 여자들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말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기야, 난 어때? 그대 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 누나랑 얘기할래? 이보세요. 나 그거 되게 잘해줄 수 있는데. 오빠 나 정말 재밌어. 내가 해줄게. 이봐요, 이봐. 그는 수없이 많은 여자들의 손이 그의 어깨, 혹은 팔을 잡고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고 있다가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은 듯, 몸을 움찔했다.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터는 시늉을 하면서.

그 때였다. 순간 그는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고 손가락을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빠르게 넘기던 댓글 중 한 여자의 리플을 선택했다.

오랜만이야. 나도 보고 싶었어. 그 날은 내가 미안했어. 우리 다시 시작할까? 


이 여자라면 죽은 그녀와 같은 말투로 그에게 메시지나 연락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담벼락 아래 선 어떤 한 여자의 손을 잡듯, 여자의 아이디를 클릭했다. 여자는 순순히 그를 따라오는 것과 같이 그에게 자신의 집 주소를 적어 보냈다. 그는 재빨리 여자의 집 주소를 옮겨 적었다. 다음 날 여자에게 그녀의 휴대폰을 퀵으로 보냈다. 여자는 이제 그녀가 되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런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다음 날 그는 과학실에서 수행평가 채점을 했다. 암막커튼이 내려져 있는 실내는 어두웠다. 창가 커튼 밑자락으로 햇빛이 가늘게 새어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창가 선반에 올려놓은 플라스크들을 향해 다가갔다. 민물이 담긴 플라스크 수십 개가 대열을 이루며 늘어서 있었다. 각각에는 몸이 잘린 플라나리아가 헤엄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마리씩 담겨 있던 그것들이 이제 두 마리가 되어 있었다. 수업시간에 몸이 잘린 플라나리아들은 회복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잘려나간 몸에서부터 머리가 새롭게 돋아나 또 다른 플라나리아가 되어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플라나리아를 바라보며, 그는 실험용 가운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만져 보았다. 지금 쯤 여자가 그녀의 휴대폰을 받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여자가 곧 그에게 문자를 보낼 것이라고. 이제 죽은 그녀의 번호가 새겨진 문자가 그에게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죽은 그녀로부터 올 문자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드디어 그의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에 진동음이 울렸다. 그는 재빨리 번호를 확인했다. 그녀였다.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뭐 하고 있는 중이야? 그녀의 휴대폰을 건네받은 여자는 그의 부탁대로 첫인사를 생략했다. 그녀의 휴대폰을 담아 퀵으로 보낸 상자 안에 그는 그런 부탁의 쪽지를 넣어 보냈다. 정말 그녀인 것처럼, 단절되었던 그녀의 연락이 다시 온 것처럼 자신이 그렇게 느끼게 해 달라고, 그러니 첫 인사 따위는 생략하자고. 그는 여자에게 온 첫 문자를 통해서 숱한 여자들 가운데 이 여자를 선택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경솔하지 않게 그녀의 휴대폰을 다루고 있었다. 그에게 신중하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문자를 보냈을 때의 설렘이 그의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그녀와의 연애가 길어지고, 결혼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오히려 희미해졌던 열정까지도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자신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단지 그녀가 사라진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메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발신번호로 도착한 문자 하나는 그에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느낌을 주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로. 그는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그녀의 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010.214.6609.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감에 사로잡혀 이런 문자를 보냈다. 당신이 살아 돌아와서 기뻐. 잠시 침묵하던 휴대폰에서 다시 진동음이 울렸다. 그는 즉시 문자를 확인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거야? 말도 안 돼. 나는 이렇게 당신하고 얘기하고 있는 걸. 

*

그렇게 여러 날 자연스럽게 그녀와의 연락은 이어졌다. 그는 그녀가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업 첫 교시면 그녀에게 문자를 받았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와 다를 게 없는 삶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더 이상 방 안에 있을 때에도 자신이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언제든 그녀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면 그녀가 답을 보내왔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해서 돌아온 그는 침대에 누워 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제는 정말 여자가 그녀처럼 느껴졌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입고 있는 게 뭐야? 나 좀 만져줄래? 그는 절실하게 그녀의 손길이 필요했다. 아니 그녀의 손길과 다름없는 문자들이. 그런데 모든 면에서 그녀와 다를 게 없이 굴던 여자가 갑자기 돌변했다. 이거, 완전 변태 아니야? 문자만 보내주면 된다더니. 난 다시는 이런 짓거리 못하겠네요. 그는 자신의 몸을 쓰다듬다 말고 믿기지 않는 문자를 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변태라고 하다니. 그녀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녀 또한 폰섹스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우선 그녀의 화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당신도 좋아했었잖아. 오랜만이고. 

그런데 뭐가 문제야? 갑자기 왜 이래? 아무리 문자를 보내도 그녀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또다시 그녀는 죽어버렸다.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가 떠올랐고, 자신의 귀 속으로 빨려 들어오던 빗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 더 이상 자신에게 오지 않는 그녀의 메시지들. 아무리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도 답은 오지 않았다. 그는 점차 온도가 내려가는 냉동 창고에 갇힌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휴대폰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휴대폰에만 집중할 뿐 그 밖에 모든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의 휴대폰이 꺼져있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죽은 건 아니고, 단지 자신에게 화가 나서 연락을 받지 않고 있는 것뿐이라고 애써 생각할 수 있었다.

그는 문자를 보내고, 보내고, 또다시 보내며 밤을 지새웠다. 어두운 방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문자를 보내기 위해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는 유령 같았다. 내가 실수했어. 정말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당신도 나를 원하는 줄 알고 그랬어. 지금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참아볼게. 문자를 보낸 뒤 답이 오지 않자 그는 또다시 문자를 적어 그녀에게 보냈다. 나한테 이러지 마요. 나 정말 힘들어요. 그동안 우리 좋았잖아요. 당신도 나와 이야기 하면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했었잖아요. 다시 물어봐 줘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늘 밤에는 우리 어떤 영화를 볼 건지. 이제 그녀로부터 답이 올 거라는 기대는 아예 접은 채 끊임없이 문자를 보냈다. 무서워지려고 해. 제발 다시 연락 좀 해줘. 아니 해주세요. 그는 그녀의 침묵을 견디다 못해 기절하듯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수당을 더 올리도록 할게요. 지금까지의 두 배로 말이에요. 제발 돌아와요. 

정말이야, 자기?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드디어 악몽은 끝난 것일까. 그는 자신의 휴대폰에 찍혀 있는 그녀의 번호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는 그녀를 놓치지 않을 테다. 그는 거울 속 면도중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문자를 또다시 바라보았다. 물론 머리로는 그 말의 뜻을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수당을 올려준다는 말이 사실이냐는 거였다. 그녀는 돈이 필요해서 그와 연락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재빨리 다르게 이해했다. 정말이야, 자기? 언젠가 자신에게 그렇게 물어보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그 때 그녀에게 조금 뜸을 들인 뒤 목소리를 낮추어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수화기로 나지막하게 들려오던 그녀의 숨소리가 기억났다. 그는 그 때로 되돌아간 심정으로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 정말이야. 정말로 널 그렇게 사랑해. 그렇게 다시 시작된 그녀와의 연락은 또다시 지치지 않고 이어졌다. 그건 수당이 높아졌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오는 보다 잦아진 문자는 그녀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다시는 연락을 끊지 마. 당신을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몰라. 학교에 도착한 그는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나서 실험실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가운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실험실로 들어갔다. 그는 회복된 플라나리아를 신기한 듯 관찰하고 있는 학생들 앞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그의 입 꼬리가 당겨 올라갔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입과 달리 그의 흰 눈자위에는 금이 간 듯 핏발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수업 시간 내내 그의 가운 주머니에서 휴대폰은 끊임없이 울렸다. 그 또한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에 나는 너무나 외로웠어. 당신이 정말로 죽었으면 어쩌나 하고 생각했다고. 당신은 늘 내 곁에 있어야 해. 그는 수줍음을 참고 진지하게 문자를 보냈다. 여러 번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생각하고, 수정한 문자였다. 그러나 그녀로부터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빠른 속도로 답이 왔다. 연락이 끊어진 이틀 동안에 그녀는 휴대폰 자판 치는 속도조차 상당히 빨라진 것 같았다. 그가 하나의 문자를 완성해서 보내고 나면, 그녀로부터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수 개의 문자들이 날아들었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시험 준비도 하고. 그녀는 말투조차 달라져 있었다. 이전과 다르게 요즘 아이들처럼 말끝을 흐리거나 줄인 말을 자주 사용했다. 무엇보다 그의 문자를 이전보다 가볍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부옇게 흐려진 휴대폰 액정을 실험용 가운 끝자락으로 깨끗하게 문질러 닦아냈다. 아르바이트라고? 당신은 이제 나랑 신혼여행도 가야 하는데 어쩌려고 그래. 이번에도 굉장히 여러 개의 메시지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차, 미안. 내가 깜박. 근데 우리 이제 섹스 할까?

그 날 밤 그는 호되게 앓았다. 더 이상 그녀에게 문자를 적어 보낼 기운이 없었다. 함께 자자는 말에 발끈해서 연락이 끊어졌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녀는 이전의 그녀답지 않게 잠자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 그녀는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오랜만에 그녀에게 연락이 와서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너무나 낯설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어지고는 했다. 잠깐만 기다려. 하고는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주일가량이나 연락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리면서 초조하게 그녀에게 사과 문자를 일방적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연결된 그녀의 말투는 끊임없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의 휴대폰은 아예 전원이 나가는 일은 없었다. 연락이 끊어져도 그녀의 폰 전원이 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안도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도무지 견딜 수 없어 그녀에게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 하는 문자를 보내고 말았다. 

자꾸만 낯설어지는 그녀에게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고민이나 분노에 대해서 그녀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서운했다.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조금만 더 내 마음을 생각하려고 노력해주면 좋겠어. 오랜 망설임 끝에 그가 그런 문자를 보냈는데 그녀로부터 이런 답변이 돌아온 것이었다. 걱정 마. 항시 대기 중. 언제든 나나를 찾아 주세요. 그는 무슨 말인가 싶어 문자를 보냈다. 갑자기 답이 뭐 그래? 그랬더니 그녀로부터 아 미안해. 착각했어. 당신이었구나. 나는 오빤 줄 알고. 하는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문자를 제대로 읽고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자동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손가락만 움직여 그에게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는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등을 건드리면, 그녀의 고개가 나사로 헐겁게 조립된 인형처럼 빙그르르 돌아 그를 바라볼 것만 같았다. 그럼 이제까지 수당은 서둘러 보내주세요.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나서 상실감에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에게 그녀의 작별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그녀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도무지 화가 나서 그녀에게 더 이상 문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며칠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또다시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답이 오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며 겨우 작성한 메시지였다. 다시 시작해요. 우리. 그 때는 내가 미안했어요. 일분도 되지 않아 문자 음이 울렸다. 그는 아마 그녀도 자신의 연락을 기다렸는가 보다 싶어 웃음이 났다. 그러나 문자를 확인한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고객님의 휴대폰이 꺼져 있어 지금은 연결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때에도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Man's time에 접속해서 그녀의 휴대폰을 보냈던 여자에게 쪽지를 보냈다. 제발 내 연락을 받아주세요. 싫다면 휴대폰이라도 돌려주세요. 

그러나 쪽지를 확인한 여자에게는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퀵으로 보냈던 여자의 집을 찾아 가기로 했다. 그녀의 휴대폰을 되찾아 와야만 했다.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는 살 수 없으니까. 


여자의 집은 낯설었다. 무엇보다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의 색깔이나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 따위는 전혀 그의 기억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 처음 와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되도록 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여자가 사실은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현관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휴대폰만 돌려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여자가 스피커폰을 받았다. 그는 여자에게 그녀의 휴대폰을 돌려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잠시 뒤 여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미안해요. 여자가 말했다. 지금 당신이 보낸 휴대폰은 내가 갖고 있지 않아요. 벌써 오래 전에 다른 여자에게 넘겼어요. 밤새 문자가 오니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그 여자 번호는 제가 지금 알려드릴게요.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여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여자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여자는 또다시 다른 여자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그는 한 자리에 선 채 또 다른 번호로, 또 다른 번호로 끊임없이 연락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은 그녀라고 믿고 연락을 주고받았던 그녀들이 사실 한 사람의 그녀가 아닌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교통사고로 도로 위에 흩어졌다던 그녀의 조각난 몸이 떠올랐다.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했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에서부터, 손목에서부터, 발목에서부터 재생력이 강한 플라나리아처럼 그녀의 몸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도로 위에는 수없는 그녀가 증식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로 위에서 무수히 증식한 그녀들이 모두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보고 싶어. 당신을 사랑해. 그는 너무나도 많은 그녀들의 얼굴을 향해 두리번대면서 진정 그녀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최종적으로 그녀의 휴대폰을 갖고 있는 여자에게 연락이 된 건 저녁이 깊어지고 있는 무렵이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제법 어렸다. 여자는 퀵으로 휴대폰을 보내달라는 그의 말에 발끈했다. 자신에게 직접 와야만 폰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여자는 그가 Man's time에 적립금을 다시 채워 넣지 않아서 자신이 일한만큼의 수당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를 믿을 수 없어 그녀의 휴대폰을 저당잡고 있겠다는 거였다. 자신이 화가 많이 났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녀의 휴대폰은 영영 받을 수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이제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게 있다면 그녀의 휴대폰이 다시 켜지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번호로 다시 그에게 메시지가 오는 것. 그가 수업을 시작할 때에 지루하지 않은지 물어봐 주고, 퇴근길 흔들리는 지하철에 앉아 있을 때 오늘은 피곤하지 않은지 위로해 주고, 그리고 잠자리에 든 자신의 몸을 쓰다듬어 주는 것. 그래서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 그런 작은 위안이 필요할 뿐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수도권에 위치한 대학 캠퍼스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을 끊었다. 그는 그곳을 향해 지친 걸음을 옮겼다. 

처음 가본 대학 캠퍼스 정문에서 그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수없이 많은 여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도무지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심지어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자신을 위로해 주었던 여자는 누구일까. 어둠이 깊어지면서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하는 캠퍼스를 바라보며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여자들의 얼굴이 어둠 속에 하나 둘씩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점점 더 누가 그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플라나리아의 잘린 몸은 다시 자라나나요? 그는 어두운 그곳이 자신이 날마다 들어가 수업하는 과학 실험실 같다고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어디선가 그렇게 물어보는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오는 여학생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 여학생에게서 땀 냄새가 났다. 여학생은 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고 속옷처럼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여학생은 자전거에서 내려 그를 향해 물었다. 아저씨에요? 그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받은 문자를 보였다. 그러자 여학생이 주머니에서 낯익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녀의 휴대폰이었다.

그는 한눈에 그녀의 휴대폰을 알아보았다. 여학생은 휴대폰 전원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켜고 있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녀의 휴대폰 액정에서부터 다시 불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 기분이었다. 빨리 약속한 수당부터 주세요.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는 그에게 여학생이 당돌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그는 잊고 있던 수당을 주머니를 더듬어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챙긴 여학생은 투덜거리며 고개 숙여 그녀의 휴대폰으로 문자를 적기 시작했다. 수당이 세다고 해서 내가 알바를 하고 싶었는데, 연락이 끊어져서 아쉬웠어요. 다시 연락하고 싶으면 얘기해. 내가 잘해줄게. 여학생은 그에게 그녀의 휴대폰을 건네준 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갔다. 

여학생이 멀어지고 나서 또다시 그녀의 휴대폰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아마 여학생은 빠른 속도로 그에게 두 통의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다시 휴대폰에 새겨져 있는 그녀의 번호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아저씨, 안녕. 그는 무어라고 대꾸해야할지 막막한 심정이 되어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그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살아서 그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