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사벌대첩 당시 일본군을 이끌었던 구로다 나가마사. |
역사적으로 소사벌에서는 두 개의 큰 전투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소사벌대첩, 청일전쟁의 소사벌전투(성환전투)입니다.
소사벌대첩은 왜란(1592~1598)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입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조선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예상외의 규모, 잘 훈련된 병사들, 우수한 무기로 조선군을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과 의병들의 활동, 그리고 명나라의 도움으로 전세는 뒤집혔고 곧 강화회담이 열렸습니다.
▲ 정유재란 당시 대회전이 있었던 소사1동 |
일본군의 북상 소식을 들은 명나라의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양호는 급히 기병과 보병 4천명을 평택 소사벌로 파병하였습니다. 좌우군으로 나눠 북상하던 일본군 6만여 명도 천안 부근에 집결한 뒤 6천여 명을 소사벌로 올려 보냈습니다.
1597년 9월 5일, 6일 사이 명나라 군대와 일본군은 소사1동 앞 소사교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습니다.
▲ 정유재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소사벌 벌판. |
북상을 포기하고 경상도 일대로 후퇴했던 일본군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소사벌대첩은 왜란 육전3대첩으로 꼽힙니다. 왜란 당시 육전에서는 행주대첩, 진주성대첩, 평양성전투, 연안성전투 등 괄목할만한 전투가 있었지만, 전세를 뒤바꾼 싸움은 평양성전투, 진주성대첩, 소사벌대첩 뿐입니다.
만약 이들 전투에서 패했다면 조선은 왜군에게 짓밟혔을 것이고, 동북아시아의 판도는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김해규 평택 한광중학교 교사
■필진 약력
▶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
김해규 평택 한광중 교사 등 경인지역 국사교사 2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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