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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공]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강화도

선사시대~ 분단 흔적 ‘역사 박물관’
주 5일제가 정착되고 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 강화도를 찾습니다. 거리도 가깝고 바다를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역사적 볼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일 겁니다. 강화도는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현재 분단의 현실까지 우리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립니다.

강화도가 위치한 곳은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만나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강가나 바닷가에 주로 모여 살았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흔적을 우리는 강화도의 고인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한반도의 중심인 한강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삼국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한강유역에서 출발한 백제가 처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의 고구려가 두 번째, 진흥왕 때 이곳을 차지한 신라가 마지막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강화도는 한강의 입구에 위치하였기에 그 주인에 따라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은 강화도 북쪽에 위치해 있어 강화도 북쪽 봉천산 정상이나 강화평화전망대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한 눈에 개성 송악산을 볼 수 있습니다. 개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강화도 북쪽의 예성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고려시대 최대 국제무역항인 벽란도가 있었습니다.

고려는 개방적인 대외 정책을 폈기 때문에 중국 송나라를 비롯해 거란·일본뿐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벽란도를 찾았습니다. 그 때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우리는 ‘꼬레아(Corea)’라는 이름으로 서양 세계에 이름이 알려졌고, 이것이 지금의 ‘코리아(Korea)’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 강화도는 수도 개경으로 들어가는 수문장 역할을 한 곳입니다.

조선시대는 고려와 달리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보통 쇄국정책으로 알려진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실시한 것이지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건국부터 고려와 달리 쇄국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따라서 쇄국정책의 모든 책임을 흥선대원군에게 씌우는 것은 다소 그가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통상 거부로 인해 열강들의 침략이 일어납니다. 병인양요(프랑스)·신미양요(미국)·운요호사건(일본) 등이었지요. 모두 강화도를 침략한 것입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가기 위해서는 강화도를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강화도에 12개의 진·보와 53개의 돈대를 둔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 고려와 조선시대 때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았을 때 강화도는 왕실의 도피처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몽골의 침략 때 강화도는 39년 동안 고려의 임시 수도로 강도라 불렸으며 조선 인조 때 만주족이 침략한 정묘·병자호란 때는 왕실이 강화도로 피난을 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는 고려와 조선이라는 1000년 왕조의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것입니다.

/이제은 인천 계산여중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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