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옹진 인천20년 보석을 다듬자

[강화·옹진 인천20년 보석을 다듬자·27] 파시(波市) <하> 파시의 기억

“조기 사라지고 허탈… 그 시절 황금기 그리워”

조기잡이 배들로 가득 찼던 해변, 쓸쓸한 바닷바람만이…
▲ 2015년 6월 24일 연평도 연평우체국 뒤편 언덕 위에서 바라본 남부리 일대. 1960년대 말까지 어선으로 가득 찼던 해변은 이제 텅 비어있다.
▲ 2015년 6월 24일 연평도 연평우체국 뒤편 언덕 위에서 바라본 남부리 일대. 1960년대 말까지 어선으로 가득 찼던 해변은 이제 텅 비어있다.
해변을 따라서 노란조기 깔아 말려
난리가 났어도 색시장사가 있더라

여자들은 물동이 이고 1㎞나 걸어
선착장 정박 어선 상대로 물 팔아

황해도지사보다 ‘연평 어업조합장’
어선들 관리해 부와 권세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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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몇 시간 일찍 찾아온다. 4~6월 꽃게잡이 조업시기가 끝나갈 무렵인 지난달 24일 오후 8시 남부리 일대를 거닐었다. 1960년대 말까지 이어진 5~6월 조기파시 때 수백 개의 상점과 술집으로 불야성을 이뤘던 이 일대는 이제 초저녁만 돼도 인적이 뜸했다.

파시때 어선 수천척이 정박해 있던 해안가 자갈밭은 대부분 매립돼 2차선 도로가 됐다. 밤에는 차가 거의 지나지 않았다.

도로 뒷골목에 빼곡히 들어서 있었던 흙집들은 새집들로 바뀌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사태 이후 정부지원으로 주택 신축 또는 리모델링이 늘어나면서 1960년대 이전에 지어진 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연평도 조기파시의 현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연평도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순(53·여) 씨가 최근 조기를 소금에 절이던 ‘간통’을 발견해 학계 등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정연학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파시는 자료나 유적이 거의 없어 연구가 어려운 분야”라며 “간통은 반드시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자산”이라고 했다.

조기파시 때 살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파시의 기억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성했던 해양문화의 현장이 사진 몇 장으로만 남게 될 지경이다.

지금이라도 남아있는 흔적과 기억을 모아서 사라진 ‘바다 위의 시장’ 파시를 문화자산으로 보전하는 것이 숙제가 됐다. 당시를 살았던 연평도 주민을 만나 파시의 기억을 모아봤다.

#피란민의 터전이 된 파시

▲ 파시의 중심이었던 연평도 남부리 골목길. 파시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지만, 30년 된 ‘마도로스 식당’ 간판이 눈에 띈다.
▲ 파시의 중심이었던 연평도 남부리 골목길. 파시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지만, 30년 된 ‘마도로스 식당’ 간판이 눈에 띈다.

황해도 연백군 출신 이은하(85) 할머니는 스무 살이었던 1950년 한국전쟁 때 남편을 따라 연평도로 피란했다.

처음에는 연평도 북쪽 대수압도로 피란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미군 함정이 섬에 와서 피란민을 모두 태워 연평도에 내려줬다고 한다. 이은하 할머니는 대수압도를 이북에 넘겨주려고 그런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피란민이 연평도에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지낼 방을 구하지 못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며칠을 잤다.

그러다가 남편이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공터에 움막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한국전쟁 이후 연평도 주민 절반 이상이 피란민이었다.

전쟁통에도 많지는 않았지만 조기잡이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이은하 할머니는 “섬에 오니까 조기가 얼마나 많은지 갱변(해변)을 쭉 따라서 누런 조기를 깔아 말렸다”며 “난리가 났어도 색시장사(색주가)가 있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섬에 와서 남편과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남의 땅에서 농사일도 도왔고, 조기를 말리는 품도 팔았다. 할머니는 지독하게 고생했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아서 1954년께 잡화점을 열었는데, 가게 이름은 큰아들 이름을 따서 ‘영일상회’라고 지었다.

주로 선원들을 상대로 식료품·담배·술 등을 팔았다. 배마다 지내던 풍어굿에 필요한 양초와 과일도 많이 팔렸고, 선착장에 가서 좌판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남자는 배 타고, 여자는 물동이 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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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조기파시의 주역은 사실상 주민들이 아니었다. 많을 땐 전국 각지에서 어선 2천여 척이 연평도 조기어장으로 몰렸으나, 그중에 연평도 조기잡이 배는 30여 척에 불과했다고 한다. 대부분 주민이 조기파시 주변에서 ‘남의 일’을 해야 했다.

북한 옹진반도에서 피란 온 노창식(76) 할아버지는 16세부터 연평사람이 선주인 조기잡이 배 선원으로 일했다. 그의 아버지도 선원으로 일했다. 그때 선원은 같이 일한다는 의미인 ‘동사’(同事)라고 불렀다. 당시 노창식 할아버지는 안강망(자루 모양의 그물)을 쓰는 풍력선(중선)을 탔다.

조기잡이 배에는 보통 선장과 동사 등 8명이 탔는데, 배의 막내는 화장이라고 불렀다. 화장이던 노 할아버지는 배에서 밥 짓는 일을 도맡기도 했다.

연평도 여자들은 마을 우물에서 물을 퍼다가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어선에 팔았다. 10대부터 중년까지 나이를 불문하고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선착장을 향했는데, 아무래도 힘이 좋은 젊은 사람이 일찍 도착해 물을 팔았다고 한다. 과거 연평도에는 우물이 10곳 넘게 있었다.

현재 연평도 성당 앞에 남아있는 우물터에서 해안가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거리(1㎞)인데, 물동이를 머리에 인 채 걸으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강향원(86) 할머니는 “물을 팔 때가 20대 중반이었는데, 15살짜리 아이들보다 늦게 선착장에 도착하는 바람에 어선들이 이미 물을 다 사서 허탕 칠 때도 있었다”고 했다.

#연평조합장 했지 황해도지사 안 한다

▲ 연평도 여자들은 파시 때문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선착장에 정박한 어선에 팔았다.  /옹진군 제공
▲ 연평도 여자들은 파시 때문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선착장에 정박한 어선에 팔았다. /옹진군 제공
1934년 설립된 ‘연평도 어업조합’은 조기 중매인에게 경매 허가증을 내주고, 경매장을 운영하며 경매 수수료를 뗐다. 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어선들에 신고비를 받고 조기어장에서 조업할 수 있는 출어허가증을 발급하는 역할도 했다.

연평도 앞바다에서 잡은 조기는 모두 어업조합을 거쳐야 하고, 수천척에 달하는 어선을 관리했기 때문에 조합장의 부와 권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조기파시가 절정에 달했던 1940년대에는 “연평도 어업조합장 하지 황해도 도지사 안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조홍준(81) 할아버지는 어업조합의 후신 ‘연평도 어업협동조합’에 63년 취직해 조기파시가 끝날 무렵인 67년까지 근무했다. 경매관리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모든 경제·사회단체 활동이 일시 중단되면서 연평도 어업조합 또한 문을 닫았다가 1963년 어업협동조합으로 재발족했다.

어업협동조합 직원의 급여도 일반 공무원보다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 할아버지는 어업협동조합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공무원보다 조합에서 일하던 때가 월급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조 할아버지는 “연평도에서 더는 조기가 잡히지 않게 된 이후 연평사람들에게 남은 건 허탈감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섬의 황금기였다”며 “지금 연평도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연평 조기를 전혀 모르는 세대가 됐다. 너무나 아쉽다”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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