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성장 풍경. /한광중 제공 |
철로·국도 건설 소외 일제때부터 쇠퇴
삶이 다양하고 풍요로워지면서 생필품과 사치품도 다양해졌습니다. 하지만 생산품이 달라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충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역이 발달했습니다. 초기 교역은 생산자가 남은 생산물을 판매하거나 교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다 상점과 시장이 발달하고 화폐가 유통되면서 상거래가 발달했습니다.
장시가 처음 나타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합니다. 신라 소지왕 12년(490년)에는 경주에 시전(市廛)을 열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향시(鄕市)가 발달했습니다. 향시는 하루 걸려 오갈 수 있는 고을 중심에 있었습니다. 향시 상인들은 생산자들이었습니다.
농민들이 농산물을 가져와 물물교환을 했던 것이지요. 조선건국 후 서울에는 시전(市廛)이 설치됐습니다. 향시의 다른 이름인 장시(場市)는 15세기 말 전라도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장시는 상설시와 조석시, 정기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매일 열리는 것이 상설시이고, 아침과 저녁으로만 열리는 것이 조석시, 정기적으로 열리는 것이 정기시입니다. 장시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중심으로 5개 장시가 네트워크를 형성해 오일장이 됐습니다.
19세기에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전국 장시가 천여 개나 됐다고 말합니다. 서울 잠실 송파장, 안성 읍내장, 은진 강경장, 평창 대화장, 함경도 덕원 원산장이 유명했습니다.
안성은 조선 후기 삼남지방 물산이 집결됐던 대표적인 장시였습니다. 안성은 동쪽으로 영남대로, 서쪽으로는 삼남대로가 지나는 교통 요지였습니다. 허생전을 쓴 연암 박지원도 ‘안성은 경상, 전라, 충청도의 물산이 모여 서울로 이송되는 길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택리지에도 ‘안성은 경기도와 호남 사이에 위치해 화물이 모이고 상공인들이 모여 서울 남쪽의 도회지가 됐다’고 말하며, 일제강점기 ‘개벽’이라는 잡지에는 전국 3대 장시로 안성장을 언급했습니다.
장시 발달로 ‘안성(安城)’은 상업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안성사람들의 생각도 변했습니다. 안성지역에 전해오는 ‘안성 큰 애기 유기장사로 나간다. 한 닙 팔고 두닙 파는 것이 자미라’라는 속요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내용을 보면 안성사람들은 다 큰 처녀가 장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분에 따라, 남녀에 따라 직업과 역할을 달리했던 조선 시대에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안성장이 발달하면서 유기와 연죽(담뱃대), 가죽신, 한지를 만드는 수공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안성 유기는 ‘방짜’라고 해서 망치로 두드려 만들었는데 서울 양반가 기호에 맞아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자 전문 연희패들도 활동했습니다. 안성 바우덕이패는 그중 가장 유명한 연희패였습니다.
바우덕이는 여자였지만 남사당패에 들어가 15세에 꼭두쇠가 됐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는 신기에 가까운 공연으로 옥관자를 하사받았다고 합니다. 번성하던 안성장은 일제강점기 철도교통에서 소외되고 평택 방향으로 국도 1호선이 건설되면서 쇠퇴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장날이면 장사꾼과 농민들이 난전을 펼치고, 손님을 부르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장마당을 울립니다.
/김해규 한광중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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