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꽃처럼 살다 요절한 한국 미학의 거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한국 미학과 미술사의 개척자로 현세 후학들에게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우현의 삶이 고향 인천에서 되살아 나고 있다. 시립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을 중심으로 우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최근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해방을 고뇌하는 청년으로, 말년엔 한국 미에 대한 천착으로 평생을 살다간 한 천재 학자의 연구 업적이 지금도 후학들의 학문 기반이 되고 있다.
지금도 낯선 학문으로 치부되고 있는 미학 연구를 평생 업으로 선택한 뛰어난 그의 식견도 놀랍지만 엄청난 양의 학문 결과물도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더구나 서양의 학문을 처음으로 받아들여 우리 실정에 맞게 재해석해 낸 그의 연구 실적은 현세의 연구자들에게 뜨거운 논쟁거리다.
우현을 따르는 후학들은 인천시립박물관에 그의 동상과 추모비를 세워 놓고 지역의 정체성으로 부활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우현은 일제시대에 미학미술사를 국내에선 처음으로 전공하고 이를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일찍부터 한국미술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에 학문적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치밀함은 지금도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그는 지난 1941년 발간된 '춘추' 7월호에 낸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전승문제'라는 논문에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민예적인 것', '비정제성', '적조미',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동원해 한국적 미의식의 탐구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얘기한 '무기교의 기교'나 '무계획의 계획'이란 난해한 용어는 서구처럼 '독자성이나 자율성, 과학성' 등을 획득하지 못했던 한국 전통미술의 제작태도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조선 미의식에 개성적, 천재주의적, 기교적 미술성이 없지만 '민예적이며 신앙과 생활, 미술이 분리돼 있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무관심성'은 인위적인 완벽주의를 거부하고 자연적 환경이나 재료의 자연성을 애호하는 한국 미술 특유의 미적 취향을 말한다. 이같은 독특한 해석을 통해 그는 한국미술의 형식적 특질 규명을 총괄하고 미적체험이나 가치 이념에 대한 궁극적인 해명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그는 자연과 인간, 예술의 하나됨이 한국미술의 미적 체험형성의 원리적 구조를 이룸과 더불어 미적 가치 이념의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미적형성의 작용과정 또는 예술적 활동주체와 관련된 정신적 가치지향성을 포괄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한국의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서구의 시야를 차용했지만 한국적 특수성을 미학적 보편성으로 연관시켜 미의식의 세계적 공감을 획득하려 했다.
그의 미술사 연구 업적 역시 서양의 학문 성과를 동원했지만 한국적 특수성을 재해석하려 한 탁월한 노력이 빛난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해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미술사를 전공하며 예술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콘래드 피들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라는 논문을 썼다. 특히 그의 미술사는 19세기 독일의 미술사학자 '뵐플린'과 오스트리아의 '리글', 러시아의 '프리체' 등 세분류의 전혀 다른 시각의 연구 방법이 동원됐다. 미술사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뵐플린'은 미술작품들의 양식을 주창했고 '리글'은 미술품에 나타난 '예술의욕'을 중요한 동인으로 꼽았으며 '프리체'는 사회경제적 배경에 무게 중심을 뒀다.
이 세가지 서로 다른 서구의 방법을 혼합해 그는 한국미술사를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백지상태나 다름 없었던 척박한 우리 미학연구 성과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술사학자 목수현씨는 “고유섭의 미술사관을 살펴보는 일은 현재 우리가 일궈놓은 미술사 연구를 그 자리에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한다”고 말한다.

우현은 지난 1905년 인천시 용동에서 아버지 고주연과 평강 채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난다. 조상때 평안도에서 제물포로 주거지를 옮겼던 아버지 고주연은 명석한 머리로 동경제대 철학과를 지망했던 재원이었으나 일제의 민족차별 교육정책에 분개해 진학을 포기한채 인천으로 돌아와 미두업에 손을 댔다고 한다. 그는 1914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 1918년 졸업했으나 잦은 병치레를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1918년 보성고교에 입학해 인천과 서울을 기차통학하면서 한용단 등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인천유성회'나 '경인기차통학생치목회' 등을 결성해 문화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는 보성고교에서 이강국 등과 함께 문학에 대한 재능을 다지고 민족정신 찾기에 부심한다. 192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고 1933년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수로 일하면서 본격적인 미술사 연구를 시작한다. 1933년 개성의 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뒤 1944년까지 11년동안 그의 연구 실적은 가히 초인적이다.
그는 이기간에 대학 조수시절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개성지역에 대한 조사와 조선의 미의식에 대한 연구, 불교 미술과 향토예술 등 미술사 전 영역에 걸친 연구를 폭넓게 진행했다.
그러나 1940년에 접어들면서 날로 폭압적이던 일제의 통치강화에다 가정의 불행까지 겹쳐지면서 그는 심신이 극도로 유약해 진다. 결국 해방을 앞둔 1944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조선미술사' 서술을 완성하지 못한채 그는 개성박물관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우현의 위대한 업적은 한국미술사학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황수영과 진홍섭, 최순우에 의해 계승된다. 또 인천시립박물관은 우현의 영향때문에 미술사를 전공했던 후배 이경성에 의해 지난 1945년 개관돼 천재 단명의 아쉬움을 달랜다.
그러나 우현의 폭넓은 연구영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장품들은 동국대에서 보관하고 있어 지역 인사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특히 그의 연구 업적을 바탕으로 민족미술의 지평을 더욱 넓혀가는 일은 후학들이 개척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인터뷰/ 이경모 시립인천대 미술학과 겸임교수

"우현 고유섭은 인천이 낳은 한국의 보물입니다. 한국 미학과 미술사의 토대를 만든 최초의 인물로서 뿐만아니라 일제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밝혀낸 민족주의자로서 우현은 높이 평가받아 마당합니다." 시립인천대학교 미술학과 겸임교수 이경모씨는 우현의 학문적 성과를 경하했다.
이 교수는 "우현이 경성제대 본과 법문학부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것도 당시로선 이례적이지만 근대적 제도교육체제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우현이 최초가 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제 당시 절대유물의 부족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우리 미술사를 올바로 규명하는데 우현의 역활이 컸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7년 발견된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바로 그것. 그는 "특히 우현이 한국의 탑을 목탑과 전탑, 석탑으로 구분하고 그 변천과정을 정확하게 밝혀낸 점은 우리 미술사에서 분류방법으로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인들이 7세기 세워진 광릉사 목탑이나 법륭사 목탑을 그들의 고유한 업적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우현에 의해 그 이전부터 벌써 한반도에서 목탑의 원형이 존재했고 불교문화의 전달경로를 제시한 점은 당시의 열악한 상황으로 봐선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우현의 천재적인 연구성과가 한국 미학과 미술사학계에 본류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후에 황수영(전 동국대총장), 진홍섭(이화여대 교수) 등 뛰어난 후학들이 그의 계보를 잇게 됐다"며 "특히 우현의 영향을 받은 전 국립박물관장 최순우 선생이 '고고미술 동인회'를 구성해 오늘날 '한국미술사학회'를 만드는 디딤돌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처럼 뛰어난 우현의 학문성과를 좀 더 체계화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지역 후배들의 몫이 됐다"며 "인천에서 우현에 대한 평가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희동기자·dhlee@kyeongin.com>
이희동기자·dhl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