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초등교육 선구자 전학준 신부

천주교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교황의 서거를 애도하는 것은 교황이 전세계에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헌신한 행동하는 교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대 교황 중 유일하게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에 대해 각별히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 교황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교황의 선종 소식은 인천에서 교육·의료·사회사업으로 인천의 소외된 이웃들을 보듬었던 푸른눈의 한 신부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인천 답동성당 제4대 신부였던 전학준(全學俊·Eugene Deneux·1873~1947)신부다.

그는 20대 약관의 나이로 인천과 인연을 맺어 인천답동성당의 주임신부로, 박문학교의 교장으로, 보육원 아이들의 어버이로 35년 반평생을 보냈다.
1873년 7월26일 프랑스 아라스 교구의 웨스트 햄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전 신부는 1896년 12월19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파리 외방전교회(外方傳敎會)의 선교 사명을 띠고 3년후에 한국에 파견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주로 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1653년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창설한 가톨릭 포교 단체다.
전 신부가 제4대 인천답동성당 신부로 부임한 것은 1904년 4월14일.
전 신부는 부임 5년전인 1899년 3월6일부터 인천답동성당에 거주하면서 제3대 서요셉 신부를 도와 사목활동을 했던 터라 인천 주민들의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천에서의 그의 사목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인천답동성당에도 한·일합방 이전부터 일본인들의 침략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전 신부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15칸짜리 건축물을 성당 부지에 건축했으며 성당 근처에 위치한 일본학교로 통하는 도로를 내려고 성당 부지를 침범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전 신부의 각별한 애정은 우선 이같은 일제의 무분별한 침탈행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천주교답동교회가 1989년 펴낸 '답동대성당 100년사'에 따르면 당시 전 신부는 일본인들의 무단 건축에도 불만이었지만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퇴거를 염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인들이 수월하게 들어와 일본식 건축물을 지을 경우, 한국인들에 대한 침범이 더욱 급속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전 신부의 인천에서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우선적으로 교육사업이 꼽힌다.
그는 인천에 둥지를 튼 즉시 인천박문학교를 설립(1900년 9월1일)하고 천주교 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초급과정의 교육을 베푸는 일부터 착수했다.
그러다가 1909년에는 직접 초대교장으로 취임해 학교를 운영했다. 이 시기에 박문학교를 다닌 학생으로는 후에 제2공화국의 총리 된 장면 박사와 서예의 대가 박세림씨 등이 있다.
전 신부는 박문학교 초창기에 학교를 유지 경영하는 데 많은 고초와 희생을 겪어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것은 재정상의 경영난보다도 천주교에서 설립 경영하는 학교라는 데서 일본인의 침략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기피하는 현상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박문학교의 학생수는 매년 꾸준히 늘어 1908년 55명에서 1909년 65명, 1910년 118명, 1911년 165명, 1912명 182명에 달했고 1915년과 1916년에는 200명을 넘었다.
이처럼 학생수가 증가하자 전 신부는 1914년 학교 내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남자부 교사 6학급까지 신축했다. 이어 1917년에는 남녀 두 학교를 합쳐 인천박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박문학교의 설립, 운영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이 학교가 제3자의 도움없이 오로지 전 신부가 상속받은 유산만으로 만들어진 학교라는 점이다.
이처럼 외국인 신부가 인천에서 교육사업에 쏟은 정열은 지금 학교 설립 100주년을 훌쩍 넘긴 인천박문초등학교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 신부는 학교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후에는 바오로 수녀원을 비롯해 해성보육원 등 본당의 기반을 이루는 시설을 확충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역시 사재를 털어 용현동과 영종도 등지에 20여 만평의 농토를 마련, 보육원에 기증하는 등 인천지역의 오갈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재정적 기반도 굳혀 놓았다.
전 신부는 또 인천의 건축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35년에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본당 성당 증·개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본당 신축공사에 나선 것이다.

높이 솟은 고딕 건축물로 새로 탄생한 인천답동성당은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 신부는 의료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3층으로 된 현대식 해성병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국만리 타향땅에서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한 전 신부는 7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전 신부가 인천에서 보낸 헌신적인 삶은 그의 장례식에 즈음해 당시 인천시장이 남긴 말에서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전 신부가 1947년 12월 9일 선종한 뒤 인천시장은 "전 신부의 업적과 비교할 때 시민들이 보답할 수 있는 일은 너무 미미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의 유해는 독쟁이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인천교구 하늘의 문 묘원에 이장돼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 문화재 1937년에 현재 모습 갖춰
지난 4일 인천시 중구 답동 가톨릭회관 옆 언덕길을 올라 답동성당에 이르니 성당 전면에 설치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을 알리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전체에 애도의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서도 답동성당은 그 웅장함과 화려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답동성당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제4대 전학준 신부 때다. 답동성당이 세워진 것은 제3대 서요셉(Maraval)신부 시절인 1896년 11월. 당시 성당위에 작은 뾰족탑이 있었는 데 선창가나 시내 곳곳에서 이 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답동성당은 제4대 전학준 신부에 이르러 확장공사에 돌입, 성전 외곽에 벽돌을 쌓은지 3년만인 1937년 6월 30일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평 396평에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추고 있다.
경인지역 가톨릭의 모(母) 교회격인 답동성당은 인천지역 교육, 의료, 사회사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인천의 격동의 역사와 함께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때론 쫓기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지은지 100년을 넘은 답동성당은 현재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 287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물의 문화재적 가치보다 정신적, 문화적, 신앙적 유산의 요람으로서의 가치에 교인과 시민들은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임성훈기자·hoon@kyeongin.com>임성훈기자·ho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