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한국 경제학계 개척자 신태환박사

이런 그를 두고 경제학계 및 교육계에선 “전쟁의 폐허속에서 한국경제를 이끈 그가 없었다면 눈부신 한국경제 발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신 박사는 서울대에서 학생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가장 행복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 박사의 호칭을 총장으로 하기로 했다.
신 총장은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나왔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집안에선 일찍이 그의 성공을 알아 차렸다. 인천고를 졸업한 그는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 동경상과대학 본과에 합격했다.

신 총장은 졸업 무렵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연희전문 교수직을 제의받게 되면서 부터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졸업 무렵 연희전문 교수였던 유억겸이라는 분이 같이 일을 하지 않겠느냐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당시 연희전문에는 백남운을 비롯한 사회주의자, 정인보를 위시한 민족주의자 교수들이 대부분 잡혀 들어가 교수요원이 부족했던가 봐요. 그래서 저는 편지를 가지고 지도교수와 상의한 끝에 유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53년 미국무성 초청 교환교수로 노스웨스턴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1년간 경제학을 연구하고 1955년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뒤 1964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연희전문 교수때 부터 케인즈 화폐이론의 성격, 화폐적 균형의 개념, 케인즈 화폐론 등 '케인즈 경제이론'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하면서 경제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 '법학지'를 처음 만들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만드는 등 남다른 열정과 추진력을 발휘했다. 이밖에도 경제학회 학술지를 처음 발간했으며, 외국어 학원 설립 등 학계는 물론 각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이런 그의 활약상은 박정희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신 총장은 회고록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초기 어느날 청와대에서 불러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 이야기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나라 경제문제 전반에 대해 이야기 했고, 박 대통령은 내 의견을 내내 경청하면서 수첩을 꺼내 깨알같은 글씨로 열심히 메모하더군요.”
그는 당시 한국경제 문제를 꿰 뚫고 있었고, 박 대통령은 그에게 경제에 대한 '과외수업'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1962년 국가최고회의로 부터 1차 경제개발계획 수립을 지시받게 된다. 바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안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이후 그는 2대 건설교통부장관, 초대 국토통일원 장관으로 입각해 한국경제를 이끌었다. 그리고 한국경제가 휘청거릴때면 늘 그가 있었다.
그의 활약상은 경제계 뿐만 아니라 교육계에서도 남달랐다. 서울대 총장시절 그는 대학의 자율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목소를 높였던 장본인. 그는 1965년 서울대 총장시절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을 징계하라는 정부방침을 정면으로 거부한 뒤 대학을 떠난 일은 유명하다.
그는 이임사를 통해 “정부가 학생들의 징계를 요구하며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한 사례는 한국교육역사상 일찍이 찾아 볼수 없었다”며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에서 지성이 유린된다면 건전한 국가가 건설될 수 없다”고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또 “그간 우리가 교권의 확립을 위해 정치로 부터 대학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목마르게 부르짖어 왔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소신을 피력하기도 했다.
대학을 떠나서도 그는 많은 활동을 펼쳤다. 산학협동재단 이사, 한국경제연구원장,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태평양과학협회 총재, 안세재단 이사장, 단암장학재단 이사, 대한민국학술원 원로회원, 정보통신발전협회 회장, 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다산경제학상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미국무성 초청 교환교수로 몬마우스대학과 디킨슨대학에서 한국문화와 경제학강의를 했다.
신 총장의 셋째 아들 국조(61)씨는 “선친께서는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대학을 떠나서도 서울대 사랑은 대단했다”고 말했다.
국조씨 말대로 그의 서울대 사랑은 남달랐다. 1975년 그는 기고를 통해 '서울대 사랑'을 이렇게 적었다.

신 총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 않은 건강을 유지하며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지난 93년 12월 31일 작고하기 직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영원한 학자' 였고 '교육자'였다. 그의 서재에는 1천 600여권의 각종 서적들로 가득했고, 유언에 따라 책들은 모두 서울대학교에 기증됐다. '인재양성만이 살 길'이라던 신 총장의 뜻을 이어 받아 그의 셋째 아들 국조씨가 서울대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송병원기자·song@kyeongin.com>송병원기자·so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