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흥섭은 어떤 작가인가.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엄흥섭을 연구했거나 그의 작품을 접한 사람들에게 엄흥섭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박진숙 성균관대 교양학부 교수는 '탄생 100주년 문인 기념행사'를 위해 엄흥섭 관련 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다. 박 교수는 “엄흥섭은 카프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며 “그는 군기사건으로 인해 카프중앙위원에서 제명되지만 그 사건으로 그의 문학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카프계열 작가들은 농민과 지주 간의 갈등, 공장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을 그렸다”며 “그는 인천에서 집필활동을 하고 동인활동을 해서 그런지 어부 노동자의 삶을 그리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봉남(성균관·세명·성공회대 등) 강사는 “당시 인천을 중심으로 문학이나 연극의 동인활동이 매우 활발히 진행됐다”며 “그때 엄흥섭은 박아지, 진우촌 등과 함께 활발한 동인활동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군기사건과 엄흥섭의 초기소설'이란 글을 쓴 장명득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카프계열 작가들이 전향을 거치는 데 비해 엄흥섭은 40년대 전까지 계급적이고 적극적인 글을 썼다”며 “40년대 이후 통속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해방 후 다시 그 이전에 보여줬던 적극적인 글쓰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월북 후 쓴 '동틀무렵'이란 작품은 북한 문학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며 “북한에서는 월북작가인 한설야만큼이나 엄흥섭의 가치를 높게 사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주형 경북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엄흥섭은 문단에 등장하기 전부터 사회주의적이고 계급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회고담에서 밝혔듯이 소학교 시절 자유주의적 진보주의 사상을 가졌던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형님이 망하면서 숙부 밑에 가난한 생활을 지냈기에 사회주의적 노선을 가졌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작품에 대해선, “투사후일담 같은 몰락상을 통해 강한 현실인식의 모습을 보여줬다”면서도 “그들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어떤 인식과 신념을 갖고 있는 지, 어떻게 투쟁했는 지에 대한 내면의 깊이를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아쉽다”고 설명했다. 또 “문학적 성취도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은 작가”라며 “그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이런 아쉬운 점들 때문에 다른 동반자·월북작가에 비해 덜 조명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대학연구소 관계자는 “엄흥섭은 월북과 함께 문단계에서 멀어지면서 그 후 관심을 덜 받았다”며 “80~90년대 월북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새롭게 이뤄졌지만 엄흥섭은 그의 작품세계와 경향에 비해 덜 주목받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에 대한 재조명·재인식이 가치가 많을 것이다. 그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