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시에 못 뵈올 님을 꿈에나 뵐까 하여/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생시에 못 뵈올 님을 中)
지난 26일 오전 11시 제 1경인 고속도로 신원 IC를 빠져나와 서울 양천구 신월동을 5분쯤 가로 질렀을까 '경기도 부천'이란 표지판과 함께 '수주로(樹州路)'가 눈에 띄었다. '수주(樹州)'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나무 고을', 현재 부평(富平)의 옛 지명이기도 하다.
주삼거리에서 좌로 꺾어 밀양 변(卞)씨 집성촌이 있는 부천시 오정구 고강본동으로 들어서자 야트막한 산이 하나 보였다.
주택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도착한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변씨 문중 선영(先塋). 조상이 대대로 500여년 살아 온 동네 이름을 아호로 삼은 시인 변영로(1897~1961)는 이곳 수주의 선영 한 쪽에 잠들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교과서에서 한번 쯤은 읽어봤을 시 '논개'로 널리 알려진 수주(樹州) 변영로 (卞榮魯).
부평이 인천에 속하기에 엄연한 인천의 인물이지만 행정구역상 부천으로 갈리며 그의 시 한 구절처럼 그립던 '그대'는 가까울 듯 멀어져 버렸다.
늦었지만 인천문화재단은 곧 변영로를 '인천대표인물'로 정해 집중조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천문화재단은 지난해 첫번째 인천대표인물로 우현 고유섭을, 올해는 두번째로 검여 유희강을 조명하고 있다. 내년도 인물로 확정된다면 변영로는 세번째 인천대표인물이 되는 것이다.
변영로는 서울 맹현(孟峴:현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수주에 있는 집은 삼화감리를 지낸 부친 변정상(卞鼎相)의 향제(鄕第:벼슬아치의 고향집)였다. 변영로는 서울 재동 보통학교와 계동 보통학교를 거친 뒤 사립 중앙학교를 다니다 자퇴했다.
18세 되던 해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친 뒤 자신이 자퇴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청춘(靑春)'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 '천재시인'이란 찬사를 받았다. '3·1 운동'이 벌어진 22세 때엔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서를 영역해 해외로 발송, 우리 겨레의 울분과 독립의 의미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변영로의 활동무대 역시 당대의 문인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서울이었다. 그가 남긴 시나 수필 등에서도 고향에 대한 애정이나 그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1989년 '번영로 전집'을 펴낸 연세대 국문과 김영민 교수는 “책을 쓴 지 오래돼 정확하진 않지만 시 중에선 고향에 대한 게 없었고, 수필 중 1편에서 '부평'에 대한 얘기가 조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영로의 호인 '수주'에 대한 애정은 그의 큰형 변영만(1889~1954)의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변영만은 조선 말기 유명한 한학자로 '산강재문초(山康齋文鈔)' 등을 남겼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영어까지 통달한 당대의 석학이었다. 지난 15일 출판된 '변영만(卞榮晩) 전집' 중엔 '여러 자식(별호) 중 또 특별히 사랑하는 자식이 있듯이 나는 항상 수주를 애용했지만 (동생 변영로가)양도해 달라는 말에 오륙분 동안 주저하다 결연히 수주를 동생에게 내줬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상들의 동네 이름을 호로 쓰고 싶어 형을 졸랐다는 일화를 통해 변영로의 고향사랑과 형제들의 수주에 대한 두터운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변영로가 한창 시인으로 활동하던 1920년대는 우리나라 서정시의 형식을 정립해가던 시기였다. 당시의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변영로 역시 최고 수준의 작품을 많이 쏟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기개높은 민족정신이 깊이 새겨진 그의 유일한 시집 '조선의 마음'(1924) 등이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세월의 물결을 따라 후세에 그의 작품세계를 전하고 있으며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은 무류실태기(無類失態記)로서 너무나 유명하다.
인하대 국문과 최원식 교수는 “변영로의 시는 서정시 초창기의 기법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뤘다”며 “작품을 떠나서라도 그가 썼던 아호 수주가 나타내는 부평 사랑은 탁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창훈기자·chkim@kyeongin.com>김창훈기자·chki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