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최영길(60·국립창극단 지도위원) 소리꾼의 생각은 다르다. 여주 신륵사에서는 19세기 판소리 '초기 8명창시대'를 이끌었던 염계달 명창이 득음을 했고, 평택은 일제강점기 5명창중 최고의 예우를 받던 이동백 명창의 무대였다. 특히 수원은 재인청이 있어 전국의 명창들이 모여들던 소리의 거점이었다.
최영길 명창이 오랜 서울 생활을 접고 최근 수원으로 터전을 옮긴 것도 끊어진 경기도의 소리를 잇고 화려했던 옛 명성을 재현해보자는 포부에서였다.
최 명창은 “지금은 소리가 거의 단절됐지만 경기도는 우리 판소리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곳”이라며 “제2의 판소리 부흥을 이룩해내겠다”고 말했다.
한국판소리보존연구회 수원시지부장을 겸하고 있는 최 명창은 지난 4월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후진 양성을 위해 본격적으로 문하생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국립창극단의 빡빡한 일정과 잦은 지방 초청공연으로 하루가 모자라지만 밤이면 수원에서 어김없이 다시 북채를 거머쥐고 문하생들을 맞이한다.
최 명창에게 소리는 곧 숙명이다. 수백년에 걸쳐 끊어질 듯 하면서도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소리가 곧 전수자와 계승자간의 역사를 뛰어넘는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최 명창에게 후진 양성은 자기 소리의 완성이자 전통의 계승이기 때문이다.
최 명창은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소리를 좋아한데다 소리꾼으로 활동하던 고모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소리를 접하게 된 그는 11살때부터 심청가와 수궁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가난했던 탓에 정식 스승을 모시지 못하고 어깨너머로 배운 소리를 흥얼거리던 그는 명창 김초선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갔다.
그뒤 전북 도문화재인 홍정택 선생에게 수궁가를, 전남 곡성 출신의 김준섭 선생에게 심청가를 각각 전수받았다. 또 중요무형무화재 한승호 선생에게 적벽가를 배웠으며, 보성소리를 대표하는 명창 성우향 선생으로부터 보성제 춘향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어려서부터 소리만 들으면 절로 흥이나고 좋았다”는 최 명창은 “선생님들 밑에서 밥짓고 청소하며 허드렛일은 도맡아 했지만 소리를 배울 수 있다는 기대에 힘든 줄도 몰랐다”고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판소리에 매진하던 최 명창은 1963년 상경, 명동 국립국장에서 활약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1976년 국립창극단의 단원이 되면서 창극과도 인연을 맺게된다. 하지만 창극과 판소리를 향한 그의 집념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국립창극단을 두 번이나 그만두는 등 숱한 위기에 부딪쳤다.
“소리만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창극단을 뛰쳐 나와 밤무대에도 서고 사업에도 도전해봤지만 결국 소리를 버릴 수는 없었다.”
이렇게 20여년간 현실과의 갈등에서 방황하던 최 명창은 1983년부터 다시 온전한 외길 인생으로 돌아왔다.
이후 최 명창이 판소리와 창극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은 이루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1992년 제18회 전주 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문에서 장원인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춘향가와 심청가를 잇따라 완창 발표했다. 또 국립창극단을 통해 놀보전의 놀보역, 심청전의 심봉사역, 춘향전의 사또역, 안중근창극에서의 고종황제역 등 각종 창극에서 주연배우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창극 사도세자에서의 사도세자역은 최 명창이 가장 애착을 갖는 배역이다.
그가 경기도 소리의 맥을 잇겠다며 수원으로 자리를 옮긴 내심에는 '효'의 고장 수원에서 창극 사도세자를 무대에 올리겠다는 꿈이 깃들여 있었다.
최 명창은 “수원 화성은 사도세자와 아들인 정조대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며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대왕의 효가 이 지역사회의 근간이 되고 있는만큼 창극 '사도세자'의 무대로 수원만큼 적격인 곳은 없다”고 말했다.
최 명창은 당초 정조대왕능행차 연시에 맞춰 50여명의 단원이 출연하는 대규모 공연을 기획했지만 예산부족으로 올해는 무산되고 현재 이를 축소한 미니공연을 준비중이다. 대작은 아니지만 일단 도민에게 창극을 알리기 위해서 오는 11월5일 경기문화재단에서 강산서편제 심청가 입체창극을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이미 대본작업을 끝내고 현재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다.
“아이고 여보 마누라 날버리고 어디가오, 마누라는 나를 잊고 북망산천 돌아가 송죽으로 울을 삼고 두견으로 벗을 삼아 나를 잊고 누웠으니 내 신세는 어이허리~.”
최 명창은 심봉사가 부인을 떠나보내고 애달픈 신세를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