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시교육청 정문 오른 쪽 인도를 따라 걷다보면 잘 가꿔진 잔디밭 가장자리에 서 있는 커다란 기념석이

김 교육감은 1981년 7월부터 1989년까지 8년동안 인천직할시교육위원회 초대와 제2대 교육감을 지내면서 인천 교육의 인프라를 깔았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인물이다.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한다는 뜻인 `교학상장'은 김 교육감의 교육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고 제자들은 전한다.
김 교육감이 인천고등학교 교장 재직시절(1977~1981) 제자인 이건주(81회 졸업)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첨단범죄수사부 부장검사는 “김천홍 교육감 하면 `큰 바위'와 `열정'이라는 두 단어가 생각난다”고 25년이 넘은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엄격하면서도 인자하고, 발로 뛰는 교육자상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이 부장검사는 “80년도에 졸업한 우리가 제대로 평준화된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김천홍) 교장 선생님은 유난히 우리에게 애정이 많았다”면서 “당시만 해도 교단엔 (교사의 학생에 대한) 억압적인 분위기가 많았는데, 선생님은 억압보다는 자율과 인격을 남달리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중국의 대표 고전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교학상장'을 몸소 실천했다는게 이 부장검사의 말이다. 예기의 학기(學記)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좋은 안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먹어 보아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극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왜 좋은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배워 본 이후에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 있으며, 가르친 후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고 국장은 “선생님은 인자하면서도 위엄이 있으셨는데, 이런 인품탓인지 인천뿐만 아니라 경기도 지역에서도 훌륭한 분으로 평가받아왔다”면서 “시대가 암울했던 80년대에 선생님은 지역 교육계에 큰 별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교육감은 특히 남동구 간석동에 살때 동네 반상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로 매사에 열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중요 기관장의 하나인 교육감이 반상회에 나오는데, 그 반상회가 잘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 교육감은 물론 반상회에서 밑바닥 교육민심을 들었고, 이를 교육 현실에 반영했다고 한다.
경인일보 1982년 7월 20일자는 김 교육감 취임 1주년을 맞아 `대화로 문제 해결하는 교육풍토 조성'이란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활동하는 교육감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시작하는 이 기사엔 김 교육감 초기의 바쁘고 열정적인 모습이 그대로 묻어난다.
타 시·도교육위와는 달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김 교육감은 그동안 600여회에 달하는 출장으로, 1개 학교에 평균 네 차례 현장 지도점검을 벌였고, 교육을 받는 학생의 몸가짐과 교사의 자질을 중요시하는 등 1년동안 인천 교육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또 교육위원회(현 교육청) 청사를 신축하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미술교육관의 문을 열었고, 부평도서관 개관, 사립학교 교원의 공립학교 등용 등의 특색사업을 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당시로서는 엄청난 예산인 20억원을 들여 중앙도서관을 착공한다는 내용도 있다.
김 교육감은 1925년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경성사범학교 보통과(5년제, 1939~1944)를 수료하고, 경성사범학교 본과(3년제)를 다녔다. 곧바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했다. 학교 졸업과 함께 마산상고 교사(1949~1950)로 교단에 섰다. 이후 진주사범학교, 대전고등학교, 선린중학교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56년 경기도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당시엔 경기도와 인천시가 광역행정구역상 분리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1961년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교감에 부임하면서는 완전히 `인천사람'이 됐다. 강화 강남중학교, 강화여상 교장으로 5년 넘게 `섬마을 선생님'으로 있었고, 잠시 교육연구소 소장과 경기도교육연구원 원장, 경기도교육위원회 학무국장 등을 지내다 인천고등학교 교장으로 교단 일선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했다.
1989년 7월 16일 연임 끝에 8년동안의 교육감 생활. 김 교육감은 꼬박 40년을 교육현장에 몸을 담았다. 평소 건강을 자랑하던 김 교육감은 퇴임 이듬해인 90년에 갑자기 쓰러져 향년 65세의 나이로 홀연히 생을 마감했다.
그가 초대 교육감 취임 일성으로 내세웠다는 인천시민의 애향심 고취를 위한 `인천의 얼' 교육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