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용(53·강화군 농업기술센터 사회지도과장)씨는 "10년 넘게 강화도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던 도중 민족의 지도자 중에 걸출한 인물로 손꼽히는 이동휘를 발견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동휘가 '보창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계몽운동을 펼쳤던 과정이 고스란히 강화의 역사로 자리잡아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가 말하는 이동휘의 일생은 '기독교', '사회주의', '민족운동'으로 분류된다. 이중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해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했던 과정과 활동에 대한 연구가 보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씨는 "이동휘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방편'으로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그동안 사회주의 활동 경력이 이동휘의 공적을 기리는데 발목을 잡아왔지만 독립운동의 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민족교육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동휘의 보창학교는 강화도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며 "특히 보창학교 학생들에게 전술과 제식 등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것은 민족운동가를 배출하기 위한 이동휘의 숨은 의도"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보창학교를 졸업한 학생 대부분은 의병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특히 훈민정음을 본따 시각장애인을 위해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창안한 박두성 선생도 이 곳을 나왔다.
이씨는 "이동휘의 업적을 국가에서 뒤늦게 인정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많다"며 "보창학교의 옛터가 강화읍 관청리 지역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동휘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동휘에게 강화도는 '민족운동의 본거지'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씨. 그는 이동휘를 기릴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강화에 동상을 건립하고, 정기적인 학술대회와 추모집회를 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임승재기자·isj@kyeongin.com>임승재기자·i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