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장명덕 전도사
내가 한 일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선지 그의 행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근대 농촌계몽운동을 그린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하면, 소설 속의 실제 인물 최용신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그 단초를 제공한 이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잘 알지 못한다.
'상록수'에 청석학원으로 등장하는 '천곡학원'을 설립한 사람은 바로 장명덕(1901~1990) 전도사. 그의 숨결을 더듬기 위해 지난 18일 길을 나섰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역 1번 출구로 나가 아파트 단지 쪽으로 500여를 더 가자, 과거 천곡교회였던 샘골교회가 보였다.

그 유명한 천곡학원이 장명덕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그가 1929년 수원지방 안산구역의 천곡교회로 파송된 뒤, 교회광고를 통해 30여명의 어린이를 모아 한글과 산수, 찬송가를 가르치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천곡학원은 시작됐다.
홍석창 목사의 저서 '최용신 양의 신앙과 사업'을 통해 천곡학원에서의 장 전도사의 역할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홍 목사는 '천곡 등지에서 장명덕 전도사의 노고와 성과는 대단했다.
카랑카랑하면서도 찌렁찌렁 울리는 듯한 큰 목소리 그리고 누구나 들으면 똑똑하다고 평할만큼 유창하고도 뚜렷한 말소리로 가,갸,거,겨, 1, 2, 3, 4를 가르칠 때면 마치 어린이의 머리를 열어 젖히고 쪽집게로 한자한자를 집어넣는 것과 같아, 배우는 어린이들은 한없이 쉽게 배웠다.
그래서 학부형들은 1년만이 아니라 계속 좀 가르쳐 주었으면 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밀러 선교사에게 전해지니 밀러 선교사는 안산구역 중에서 가장 성과가 좋은 천곡을 지정해서 모범적인 강습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장명덕 전도사야 말로 천곡학원의 터를 잘 닦아놓은 인물이라 말할 수 있다'고 장 전도사를 평가하고 있다.
이런 그의 역할은 왜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 의문은 장 전도사의 외동딸 박미화(87)씨가 건네준 잡지를 보고는 금세 풀렸다.
1989년의 '주간 기독교'의 임병해 편집부장은 장 전도사를 직접 만났을 때의 첫 대화라면서 이렇게 적었다.
"만남과 대화는 얼마든지 좋지만, 세상에 알리거나 기사화하는 것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 정말 싫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이야기가 없다." 장 전도사는 자신이 해 온 일을 남에게 알리길 진정으로 꺼렸던 것이다.
그는 드러내지 않고 숨은 곳에서 계몽활동을 해오는 한편, 일생을 교회의 전도활동에 바쳐왔다. 그의 전도활동의 흔적은 현재 '인천 창영감리교회 70년사'를 집필중인 오상철(72)씨를 통해서 찾을 수 있었다.
오씨는 "창영교회의 역사를 쓰던 중, 일제 말기에 장 전도사가 이곳을 다녔던 것을 알게 됐다"며 "1940년대 초 인천 화도교회의 전도사로 있던 장 전도사가 일제의 교회 통폐합 압박으로 화도·내리교회로 통합되자, 친오빠가 장로로 있던 창영교회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해방 이후 통합돼 있던 교회들이 분리되면서 당시 창영교회와 통합돼 있던 숭의교회 교인 중 일부가 나와 인천 중구 신흥동에 일본인이 남기고 간 가옥에 신흥교회를 지었다"며 "장 전도사가 마침 신흥교회를 짓던 현장을 보고는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초기 설립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기독교가 빨리 전해졌던 지역에서 자라왔고 그의 친오빠 장기진과 가족들이 그의 학업과 사회활동을 뒷받침해주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장 전도사는 지난 1901년 9월 19일 경기도 부천시(당시 부천군으로 기록) 소래면 무지리에서 1남 3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이 마을은 기독교가 일찍 들어와 이미 미국 선교사가 지은 흥업강습소가 있었고, 이곳에서 공부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14년 인천 영화보통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1920년께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박영식씨와 결혼하고 딸을 낳았고, 1922년 친오빠의 권유로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홍순탁 목사의 권유로 서울의 상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고, 수원의 삼일여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미국 여성 밀러 선교사의 요청으로, 1년 정도 이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을 했다. 그 후 서울과 경기, 인천 등지의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다가 1949년께에는 서울 흑석동에 여성 종교인들의 노후를 위한 안식처인 안식관의 책임업무를 맡게 된다. 이후 14년간 이 일을 하면서 헌신적인 종교활동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평소에 "다리품 팔아서 남들이 가기 전에 그저 길 하나 닦아 놓은 것 외에 무슨 자랑이 있겠습니까"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왔다고 한다.
각 교회를 다니며 종교활동을 해온 그는 바로 여성종교인 안식처인 안식관 306호에서 여생을 보내다 지난 1990년 9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머리맡에는 '마음을 깨끗이, 생각을 깨끗이, 말씀을 깨끗이, 생활을 깨끗이'라는 글귀가 항상 놓여 있었다고 한다.
<윤문영기자·moono7@kyeongin.com> 윤문영기자·moono7@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