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개신교 최초 여성목사 전밀라

   올해로 70년을 맞는 인천 동구 창영동에 위치한 창영감리교회. 이곳 1층 사무국 내 한쪽 벽면에는 역대 목사 12명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남성 목사의 사진이 이어져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 목사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벽 가운데에 놓여진 제 7대 목사, 바로 전밀라(1908~1985) 목사다. 전 목사는 이 교회에서의 최초 여성 목사로서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개신교의 다양한 종파를 통틀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목사다.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위치한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박물관의 윤춘병(90) 감독은 "1930년 조선감리교회가 조직되면서 여자도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었다"면서 "하지만 여성들은 신학교를 나왔어도 대부분 목사를 돕는 전도부인에 그치는 편이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이같이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교회,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깨고 여성 목사가 된 것.

   윤 감독은 "그 당시에는 여성이 목사로서 잘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 섞인 의견들도 나오곤 했다"면서 "전 목사는 이 같은 편견을 깨도록 만든 인물로 이후에 여성 목사가 나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단정했다. 그는 "전 목사가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남자 못지 않다는 말들이 많이 나왔고 여성 목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며 "그렇다고 괄괄한 성격으로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온건하면서 강한 의지를 가진 것이 얼굴에까지 그대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 전밀라 목사가 1955년 서울 정동교회에서 류형기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는 장면.
   전 목사는 1955년 서울 중구의 정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뒤 처음 목사로서의 역할을 맡기 시작한 곳이 창영교회였다.

   이곳의 부목사로 파견됐던 전 목사는 1958년에 제 6대 목사인 박신오 목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담임목사로 1년여간 교회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훨씬 이전부터 인천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1935년께부터 강원도 원주 제일 감리교회, 함경남도 원산 중앙교회, 서울 남산교회 등에서 전도사로서 활동을 해오다 인천으로 파견됐던 것.

   처음 창영교회에 파견돼 인천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해왔던 것은 1947년부터였다. 그는 이때부터 4년여간을 창영교회에서 황치헌 목사를 도우며 전도사로 있었다. 그 뒤 1951년부터는 인천 부평구 갈산동의 갈월교회에서 교회 담임 전도사로 활동했다.

   이는 목사로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담임 전도사로 2년여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와 인천에서 2년여간을 같이 살았던 방순자(82·여) 목사는 "창영교회의 강치안 장로가 당시 전밀라 전도사에게 목사가 되라고 권유하며 갈월교회를 소개시켜 주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고 말했다.

▲ 전밀라 목사가 설교하는 모습.
   방 목사는 "전 목사는 개인적인 고민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며 "그래서인지 목사가 되려고 하는 때에도 불안한 모습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인천 창영교회 70년사'에서 전 목사가 창영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가장 좋아하던 찬송가가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였다고 써 있는 것을 통해, 어려움을 담담하게 감내하는 성격이 신앙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을 엿볼 수 있었다.

   1908년 충북 제천군 덕산면 수산리에서 1남4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는 기독교를 일찍부터 받아들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을 갖게 됐다.

   그의 아버지인 전연득씨는 당시 청양, 충주 등지를 돌며 전도활동을 해왔고 가족들은 집에서 매일 가족예배를 했다.

   방 목사는 "전 목사의 아버지는 각 동네를 돌며 성경의 부분부분을 모아 만든 책을 전하는 일을 했다고 들었다"며 "그러다보니 집안 살림이 너무 어려워 전 목사는 학교도 뒤늦게 들어갔고 주변의 이웃이나 선교사들이 공부하는 것을 지원해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1931년 공주의 영명여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에는 감리회 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전도활동을 하면서 1939년부터 1년간 일본의 아오야마 학원(청산학원)에서 신학부를 수료하기도 했다. 전 목사는 창영교회를 거쳐 1960년에는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양광교회의 초대 목사를 6년여간 맡고, 여선교회 전국 연합회 총무로도 8년여간 일했다.

   그의 활동은 교회에 그치지 않고 인천 영화학교 재단이사, 배화학교 재단 이사, 명덕 학교 재단이사 등을 역임하며 교육계에서도 역할을 했다. 이같은 다양한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지냈다.

▲ 설교 공책
   전 목사는 1979년 5월13일 서울 양광교회에서 은퇴를 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특별한 과오없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교회를 중심으로 일하겠다"고 밝힌 소감처럼, 서울 정릉의 안식관에서 성서교육과 전도활동으로 여생을 보냈다.

   1985년 10월30일 그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 남동생(전재희)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사진= 감리교 신학대학교 역사박물관 제공

<윤문영기자·moono7@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