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두 한 켤레로 거의 반생을 사셨습니다. 아버님은 오로지 '교육'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던 분이셨습니다."
백파 조석기 교장의 장녀 계성(75·수원시 영통구 영통동)씨는 선친을 청렴결백과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헌신했던 분으로 기억했다.
조씨는 "당시 아버님의 적은 월급으로 7명의 아이를 키우느라 어머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어머님은 아버님에 대해 늘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칭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교사들은 적은 월급으로 생활을 꾸려가기 빠듯했어요. 그래서 일부 교사들은 적은 월급을 보충할 요량으로 반 아이에게 개별 과외수업을 지도하기도 했지요. 일종의 부수입인 셈인데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엔 관행으로 묵인됐어요. 당시 창영초교의 어떤 교사도 과외수입을 올리려고 했는데 여기에 대해 아버님은 대로하며 꾸짖었습니다. '교사가 교권을 바로 세우지않고 돈때문에 학부형에게 굽신거리면 더이상 선생을 하지 말라' '배다리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라'는 식이었습니다."
백파가 15년동안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살았던 창영초교의 좁은 사택에는 9식구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부인 김중구(2001년 작고)씨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지만 6·25때 사망한 남동생 소생의 조카 2명과 가난한 제자 1명이 더해 7명의 아이들이 좁은 사택에서 북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씨는 "아버님은 대한제국 말기에 난 사람이지만 아버지 앞에서 다리를 뻗거나 누울 만큼 자유스러운 집안 분위기를 만들었다"며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하지않고 화내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고 술회했다.
<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