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인천 최초 치과개원 임영균

 

  24일 오전에 찾은 인천시 동구 배다리의 옛 '인천양조장' 건물은 내부 수리를 하느라 부산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곳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술을 다시 빚기 시작한 게 아니라 인천의 유명 문화단체인 '스페이스 빔'이 이곳에 둥지를 새로 틀기로 하고 리모델링을 하는 중이었다.

   이 인천양조장 건물 바로 옆에는 80년 된 한옥이 한 채 있다. 인천 최초로 치과의원을 낸 임영균(林榮均·1904~1966)의 집이다.

   지금도 그의 며느리 주현숙(72)씨와 손자 상호(50)씨 가족이 살고 있다. 집이 양조장과 붙어 있는 것은 바로 임영균이 양조장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임영균의 이력은 참으로 다양하다. 치과의사이면서 양조장 사장에 그친 것이 아니다. 문화예술인이었고, 언론인이었다. 또 로타리클럽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런 그의 다양한 삶의 궤적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기록된 게 없다. 집안 식구들도 희미한 기억만을 떠올릴 뿐이다. 가장 가깝게 지냈다는 김관철(90) 지성소아과 원장도 정확히 짚어내지 못했다. 김 원장은 임치과 임영균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왔다는 물음에 "치과의사뿐만 아니라 굉장히 유명한 분이다"라면서 며칠 내로 기억을 더듬어 기록해 주겠다고 했으나, 연로한 탓인지 임영균에 대한 뚜렷한 행적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그는 다만 "임영균 원장님이 보통 분이 아니었고, 과거 지성소아과를 운영할 때 무료로 건물을 임대해 주기도 했다"면서 고마워했다.

▲ 임영균선생(셋째줄 맨왼쪽)이 타계 이년전인 1964년 9월 국제로타리클럽 회원들과 연수회를 떠나 단체사진을 찍었다.
   손자 상호씨는 "할아버지는 밖에서 하시는 일을 집안에서는 자세하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었던 것 같다"면서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40년 가까이 한 집에 살았는데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옛 일에 대해 아시는 게 많지 않았다"고 했다.

   임영균에 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고일 선생이 1955년 펴낸 '인천석금'에 있다. 이 책의 인천 문화 운동사 편에만 임영균의 이름이 문학, 연극, 신문 등 세 군데나 등장한다. 당시 임영균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었고, 또 직접 참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다음과 같이 임영균을 언급하고 있다.

   그 첫째가 개항 이후 인천의 최대 엘리트 집단으로 불리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부분이다.'인천 문화 운동사의 첫 장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에서 열었다. 한용단의 어머니 격인 친목회는 인천의 문학 청년을 아들로 탄생시켰던 셈이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운동경기를 내세웠으나,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문화운동을 펼쳤다.

   정노풍, 고유섭, 이상태, 진종혁, 임영균, 조진만과 필자는 문학 동호인으로서 습작이나마 등사판 간행물을 발행했었고,…' 이때는 1917년 이후 서울 YWCA중학에 다닐 때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얘기하고 있듯이 어린 임영균은 독립운동도 직접 펼쳤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통신망을 절단하고 전단지를 살포했다는 죄명으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 임영균 선생의 며느리 주현숙씨가 집 옆 옛 인천양조장 건물의 내부수리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학창시절 문학에만 심취했던 게 아니다. 인천석금에는 그가 연극과 무척 깊은 연관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인천의 극(劇) 연구와 공연 단체로서 특기할 만한 것은 '칠면구락부'의 출현이다. 그 부원은 비록 몇몇 동호인이었으나, 인천 연극 운동에 끼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토월회의 무대 장치가 원우전, 노련한 영화 배우이자 연출자인 정암, 극작가 진우촌과 그 외 임창복, 임영균, 한형택, 김도인, 필자 등이 간부진이었다. '칠면구락부'가 조직되기 전의 인천 연극 운동은 자연 발생적이었다.

   별다른 목적 의식이 없어 이따금 청년들에 의해 공연을 가진 데 불과했다.' 정암, 진우촌 등은 우리나라 초창기 연극계의 중추인물이다. 임영균은 이들과 함께 연극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맡았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영균은 지역 언론 발전을 위한 일에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석금에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이 여실히 드러난다.'현재 발간되는 '주간 인천'은 순 민간인의 향토지로 임영균 군이 발행인이고, 대중일보와 인천신보에서 다년간 종사했던 김응태 군이 편집 책임자이며, 반민특위에서 엄정한 판단을 내렸고 청년 단체와 정당에서 민첩한 수완을 발휘했던 권성오 군이 주간이다.' 신문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그는 순수 향토지를 경영했던 것이다. 그것도 당대 최고의 언론 종사자들과 말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가 1950년대 후반에 경기매일신보(문)를 설립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며느리 주씨는 "해방 이후 언론인으로 신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막내 동생(임근수)의 권유로 경기매일을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때 아버님은 송수안씨를 부사장으로 앉혔다"고 말했다. 송수안씨는 대중일보의 발행인을 지낸 인천언론계의 대부 격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해방 이듬해 대중일보를 만들었던 송수안은 1950년 9월 사장으로 취임하고 제호를 '인천신보'로 변경했다고 한다. 인천신보는 당시 전쟁상황을 보도한 유일한 지역 신문이었다.

   한때 부산으로 피란을 가기도 했던 인천신보는 1953년 정전 협정이 성립된 뒤 인천에서 다시 신문을 제작한다. 1959년 9월 '기호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뒤 다시 1960년 7월 '경기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꾼다.

   여기서 말하는 경기매일신문과 임영균은 분명히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씨는 "아버님이 경기매일을 설립하시고 2년 정도 있다가 경영이 제대로 안돼 언론을 잘 아시는 송수안씨에게 넘긴 것으로 안다"면서 "경기매일은 이후 송수안씨의 아들 용호씨가 맡아서 했는데, 신문이 통합되면서 화병으로 용호씨는 세상을 떴다"고 회상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임영균은 언론사를 두 개 설립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인천석금에 나오는 주간 인천은 1954년에 법인 등록을 했다. 고일 선생이 당시 상황을 기록했으니 틀릴 리는 없는 것이다.

   또 10여 년이 지난 뒤에 경기매일신문을 세웠다가 이를 송수안씨에게 넘겼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가족들은 먼저 있었던 주간 인천에 대해선 알지 못하고 있고, 나중의 경기매일신문 부분만을 기억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임영균이 경기매일신문을 설립하게 했다는 동생 근수씨는 우리나라 신문학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연희전문을 나와 배재중학교에서 교사로 잠시 있었으나 해방 이후 언론계에 투신, 영문판 코리아타임즈 기자를 했다.

   또 외무부 의전과장도 역임했다고 한다. 1950년대엔 서울신문사 상무이사도 했다. 홍익대에서 신문학과 조교수를 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신문학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전하는 임영균 선생의 이력은 간단하다.

   영화학교를 졸업하던 1915년에 잠시 취업했다가 1917년 서울 YWCA중학에 입학했고, 3·1운동 때 투옥됐다. 1922년에 중학을 졸업하고 경성치전에 입학했다. 1926년에 치전을 졸업하고, 그 해 서울대학병원에 취직했다. 이듬해 인천에서 '임치과'란 이름의 첫 치과병원을 개원했다. 그리고는 1966년 비교적 젊은 나이인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물론 경기도 치과협회 회장, 인천 로타리클럽 회장, 경기매일신문사 설립(1956~1957) 등의 사회활동 경력도 있다.

   임치과 개원 이후의 상세한 활동 내역이 없는 것이다. 임영균은 치과의사들 사이에선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꼽히는 게 분명할 만큼 활동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 가족들과 함께한 임영균 선생.

   2002년 경기도 치과의사회 회장을 맡았던 김성우씨는 한 기고에서 '회보가 창간될 초창기만 해도 구강보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극히 저조하였고, 도회나 회원들도 다양한 회무를 수행할 만큼 여건이 좋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초대 회장인 인천 출신 임영균 회장은 평소 도회 소식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A4 4면의 경기도치과의사회보를 최초로 발간하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대 집행부를 거치면서 회보 내용과 편집에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임영균 선생은 어디를 가나 소식지 등 '언론'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임영균의 어린 시절 이름은 갑득이었다고 한다.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 밑으로 호적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의 큰 아들은 임명진(70) 전 대사다.

   #임영균치과와 인천양조장

   치과의사 임영균이 양조장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양조장 집 무남독녀를 부인으로 맞았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 최정순 여사는 지난 해 세상을 떴다. 동덕여대의 전신인 동덕고녀를 다니다 임영균 선생을 만나 결혼하게 됐다고 한다. 최정순 여사의 집안이 양조장을 했다고 한다.

   손자 상호씨는 "양조장 이름을 인천양조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양조장이 인천에서 가장 먼저 법인 등록을 했기 때문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지금은 부평으로 터를 옮긴 배다리 인천양조장의 규모는 무척이나 컸다고 한다. 직원만도 20~30명이나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며느리 주현숙씨는 "아버님은 명의만 양조장 대표로 돼 있었지 양조장 일에는 크게 관여하시지 않았다"고 했다. 양조장 일은 직원들이 다 알아서 했다는 얘기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