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뜻 생각하기에도 당대 최고 명망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관련한 변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고 이훈익 선생의 저서 '인천 성씨·인물고'와 인천시의회가 2005년 발간한 '인천광역시의회사' 정도에 짧게 언급되는 게 고작이다.
이들 책자에서는 이명호를 '대표적 인물', '선비', '전국 유일의 최장 동장 기록보유자', '인천의 산 역사', '재건 인천의 호프'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모두 극존칭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인물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을까. 그나마 있는 기록마저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어떤 곳엔 태어난 연도가 1888년으로 나와 있기도 하고, 심지어 인천시의회사에 보이는 생년월일의 날짜도 잘못돼 있다. 7월30일생인데 7월31일로 돼 있는 것이다.
지난 5일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그의 셋째 딸 임숙(85)씨가 살고 있다는 경기도 안양시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 임숙씨는 몸이 많이 불편하다고 했다. 이날 만난 이명호 의장의 외손자 김창현씨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어머님에게 조금 들은 게 전부"라고 했다. 이 의장은 아들이 없이 딸만 6명을 두었다는 얘기도 외손자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외할아버지가 김찬삼 선생의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고, 동산고등학교 지원 과정에서 두 분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교육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가졌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그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나마 생생한 이모가 서울에 계시다고 알려줬다.
하루 뒤 다섯째 딸인 양숙(79)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이명호 의장과 관련한 종전 기록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몇 가지 중요한 얘기를 해줬다. 6·25 전쟁 중에 인민군이 인천에 왔을 때 평소 행한 선행으로 지주였지만 화를 면했다는 것과 조봉암 선생이 농림부 장관을 할 때 단행한 토지개혁으로 많은 땅을 소작농들에게 내어 줘야 했고, 세상을 떠났을 때 화장을 했다는 것 등이었다. 기존 기록엔 이 전 의장의 사망연도를 1970년으로 적고 있지만 양숙씨는 1968년 9월14일(음력 7월27일)이라고 했다.
"아버님은 온유하시고, 대쪽같이 청렴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의 것에는 전혀 욕심을 내시질 않으셨습니다. 특히 재물에 대한 애착이 없으셨어요."
만석동과 송도 쪽에 땅이 많았다는 이명호 의장은 6·25 때 큰 곤욕을 치를 뻔 했단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지역주민들에게 베푼 일과 수도국산 달동네의 없는 사람들에게 잘 해준 일로 인해 그 화를 면했다고 양숙씨는 전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우리집으로 빨갱이들이 들어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때 제가 그랬어요. 우리 아버님이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셨는지 수도국산에 가서 알아보고 오라고요. 그랬더니 그들은 더 이상 우리 집에 찾아오지 않았어요."
이명호 의장은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갈 처지에 있는 우리 젊은이들을 많이 빼돌렸다고 했다. 지주로서 일본인들과의 두터운 친분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공을 나중에 돌려받은 것이리라.

특히 조봉암 선생의 딸 호정씨와 양숙씨는 고등학교(인천여고) 동기동창이라고 했다. 양숙씨는 나중에 적십자사 인천지회장을 맡기도 했단다.
인천시의회사는 '제1편 지방자치시대의 개막과 인천시의회의 성립'에서 초대 시의원을 설명하면서 1953년 발행된 '인천시공보'에 나온 소개 글을 싣고 있다. 여기에선 이명호 의장을 '드높은 향기 풍기는 향토 인천의 산 역사'로 평가하고 있다.
1953년 1월17일자 인천공보는 이명호 의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당 63세로 현 시의원 중 최고령자인 초대 인천시의회 의장 이명호씨는 그야말로 인천의 산 역사이다. 구한국·왜정·미군정·대한민국 등 유전무상(流轉無常)한 역사의 호흡을 인천이라는 공간 속에서 응시하여 온 씨는 명실공히 재건 인천의 호프인 것이다. 선천적으로 씨가 소유하고 있는 품격과 후천적으로 축적된 고결한 인격이 씨의 귀중한 인생경험과 아울러 높은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러기에 씨가 주재하는 의정단상은 늘 풍부한 인간미와 성실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의정단상의 이명호씨의 특징은 부드러운 어조와 인생의 달관에서 오는 태도가 있는가 하면 씨는 연설할 적에 늘 오른편 손을 허리에다 대고 있는데, 일부 인사는 숙환인 요통의 소치라 하지만 그것은 오류로, 대 인천의 무거운 짐을 쌍견(雙肩)에 진 씨의 상부의 중량이 너무나 가중하기에 어느 안정성을 기하려는 씨의 생활태도라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라 하겠다. 앞으로 씨의 책무는 매우 무거우며 시민의 시대는 크다."
이 때 공보는 시의회 구성 이후 새해를 맞아 신년 연쇄 인터뷰 형식을 취해 시의원 개개인의 면면을 꼼꼼히 담았다. 당시 공보의 시의원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 띄워주기 위주였다고는 하지만 여기에서 몇 가지 사실은 짚을 수 있다. 28명의 초대 시의원 중 최고령이었다는 점과 개항기 격동의 공간이었던 인천에서 죽 살았다는 점, 인간미가 있었고 성실했다는 점, 그리고 고질적인 요통을 앓고 있었다는 점 등이다.
이명호 의장이 상당한 재산가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가 재산가이자 명망가였다는 점은 이훈익 선생의 '인천 성씨·인물고'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인천 토박이 가운데에도 손꼽히는 송림(松林) 이씨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다. 인고(仁高)의 전신인 초창기 일어학교 출신이며 한학을 겸비한 선비였다. 일제 때 월미도관광주식회사가 설립되자 일인(日人) 설립자만 있는 가운데서 유일한 한국인 자격으로 이사가 돼 활약했다. 또한 인천 송림동의 오랜 연고로 해서 송림동 동장만 27년간 맡아 함으로써 전국 유일의 기록을 남겼다. 8·15 광복 후 인천 동명학원의 재단 이사로서 학교 운영에 뒷받침을 크게 하였고, 1952년 인천시지방의회가 구성되자 초대의원으로 당선됨과 동시에 초대의장으로 선출돼 지방의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의장은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인천에서 이승만 계열에 속해 활발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대통령 선거과정을 기록한 김영일의 '격동기의 인천 광복에서 휴전까지'란 책에 비친다.
"… 당시 이곳(인천)의 여당으로는 자유당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들은 과거 '민족청년단' 출신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동년 7월 말 갑자기 돌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저녁 필자는 최성길 동인천서장의 초대를 받고 서장관사에 가보니 약간의 음식준비가 되어 있어 술 몇 잔씩이 오고 갔는데 최 서장은 별안간 특청이 있으니 꼭 승낙해 달라는 전제로 내용인 즉, 이번 '정·부통령 선거'에 있어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 후보에 함태영 선생 체제의 인천지구 '선거사무장'이 되어 달라는 청이었다. … 그때 선거대책위원회는 위원장에 이명호, 부위원장에 김경일(金京日), 사무장에 김영일(金英一)로 결정되었으며, 불과 1주간이란 짧은 시간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그 결과는 상부 의도대로 두 분이 모두 당선되었다."

이런 이명호가 초대 인천시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권의 힘이 지방의회에도 크게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가 있은 지 10여 일이 지난 1952년 5월5일에 처음 소집된 제1회 인천시의회에서 그가 초대의장에 뽑혔고, 부의장은 하상훈씨가 됐다. 하 부의장은 인천곡물조합장 등 지역의 유망단체 30여 곳에 몸을 담고 있었다. 이런 하 부의장을 눌렀다는 것은 이 의장의 당시 사회적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 의장은 의원들을 향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1953년 6월18일 제7회 인천시의회가 열렸는데, 의원 16명만이 출석했다. 그러자 이 의장은 개회사에서 "오늘은 전례없이 출석률이 좋지 못한데 출석하신 여러분께는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지마는 시민들로부터 부탁받은 우리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여러분 의원께서는 항상 출석에 유의하여 주시기를 바란다"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송림동 219가 집이었던 이명호 의장은 사랑방을 송림동 사무소로 내줬다고 한다. 그러나 27년을 한 동사무소(송림동)의 동장을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딸 양숙씨도 정확한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에 주안 선산에 모셔져 있던 조상들을 화장했고, 자신도 화장할 것을 유언했다고 한다. 아들이 없기 때문에 그랬다는 게 양숙씨의 얘기다.
이명호 의장의 행적과 관련해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가 어떻게 일본인이 운영하는 월미도관광주식회사의 유일한 한국인 이사로 활동했는지와 미군정 시기, 그리고 시의원 이후의 활동이 자세히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다.
어찌됐든 인천공보에 나오는대로 '인간 이명호'의 삶은 그 자체로 개항기 인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인생역정이 파란만장했던 것은 분명하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