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초등학교 졸업생 명부에 '조봉암(曺奉岩·검은선 안)'이란 이름이 선명하다.
"…내가 8·15 그날부터 오늘까지 인천에 틀어박혀서 당, 노조, 정치 등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입을 봉하고 오직 당부의 지시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의 정열을 가지고 정성껏 해왔소.…"

1946년 5월 신문지상에 게재된 '존경하는 박헌영에게'란 제목의 글엔 죽산 조봉암이 해방직후부터 1년여 동안 인천에 머물며, 공산당 활동과 노동운동에 매진했다는 점을 잘 설명해 준다.

죽산은 또 인천에서의 공산당 조직이 비정상적인 것이 많음을 이 글에서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이 뒤로 죽산은 '공산주의 모순 발견'이란 소책자를 쓰는 등 공식적인 반공노선을 걷는다. 당시 상황에서 '목숨'처럼 여기던 당을 공개 비판하고, 노선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죽산이 어릴 적부터 몸에 밴 '곧은 기상'과 철저한 자기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봉암은 4년제 소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마쳤다고 자술하고 있다. 이 두 학교가 지금의 강화초등학교인 듯하다. 15일 강화초등학교에서 확인한 졸업생 명부엔 1912년(明治 45년) 15세의 나이로 돼 있다. 제4회 졸업생이었다. 4회 졸업생 수는 18명이었다. 12세에서 19세까지 나이 폭도 컸다.

조봉암은 초등학교 졸업 뒤 극심한 가난으로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1년을 허비하다 16세 나이에 10전을 받고 강화군청에서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18세엔 월급 10원을 받는 고원(雇員)이 됐다. 이 때 조봉암의 주산 실력은 최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대장을 꾸미느라 숫자를 맞추고, 통계를 내는 데 10명의 일을 혼자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심술꾸러기 상사'와의 불협화음으로 이내 그만뒀다고 한다. 이 때도 잘못하지 않은 일에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죽산이 불의라고 여기는 것에 절대 타협하지 않았던 기백은 이미 어릴 적 고향 땅 강화에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죽산은 강화에서 3·1운동에 참여한 게 계기가 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민족'과 '애국'을 마음 속에 새기게 된 기틀이 됐다.

죽산 조봉암이 1948년 제헌의원으로 나섰을 때의 일을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창영초등학교 3~4학년 시절이었는데, 이용균이란 친구로부터 조봉암이란 이름 석자를 처음 들었어요. '조봉암이란 사람이 아주 훌륭한 분인데, 테러 위협 때문에 본인 집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우리 집에서 잤다'는 겁니다. 그 때의 인상이 너무 커 아직도 조봉암에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선거 포스터가 손바닥 둘을 합친 정도 크기였는데, 누군가 포스터 위에 '개'라고 써 음해하기도 했어요."

지 이사장은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다"면서 "조봉암을 단지 창녕 조씨로, 강화로, 인천으로 묶어 둘 사람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조봉암을 기리는 데 너무 지엽적인 것에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평화통일이 되면, 인천은 한반도의 중심지역이 되는데 이는 죽산이 인천에서 난 것과 전혀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이제 인천의 후세가 나서 죽산을 올곧은 인천인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