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중구에서만 25년간 환경미화원으로 활동하다 며칠 전 정년 퇴임한 김성태(60·남구 용현동)씨. 긴 시간, 한결같이 이 동네를 누빈 까닭에 어느 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생생하다.

당시 쥐꼬리만한 월급에 몇번이고 그만두려 했단다. 한달 꼬박 일하면 12만7천원이 손에 들어왔다. 월세 내기도 벅찼지만 띠동갑 차이나는 아내가 있어 선뜻 사표도 내지 못했다.
첫 근무지인 연안동. 지금의 보행로는 아예 비포장 도로였다. 일대 원목을 쌓아둔 창고에서 나무먼지가 지독하게 날렸다. 쓸어도 쓸어도 또 쌓였다.
1년이 지나 월미도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전 연안동보다 작업환경은 나았지만 일이 너무 많았다.
"즐비한 횟집들에 손님들이 넘쳤고 바닷가로는 포장마차가 매일 밤 불을 밝혔습니다."
새벽 5시에 시작해 정오쯤 오전 일과를 마친다. 정해진 오후 업무는 1~5시인데, 워낙 관광객이 북적대는 곳이라 제때 퇴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과거 쓰레기봉투가 없던 시절, 김씨의 사소한 도움에도 풍성한 보답으로 되돌아왔다. 한 번은 쓰레기 수거차가 다닐 수 없던 막다른 골목 가정에 와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직접 리어카를 끌고 연탄재와 각종 오물을 치워주었더니 3천원을 내밀었다고 한다. 현재 3만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1997년 지금 동인천동으로 합쳐진 내경동 일명 '가구골목'에서 활동했다. 배다리 시장에서 기독병원까지 100여곳의 상점이 성업 중이었다. 포장재, 스티로폼 등 엄청난 쓰레기로 매일 2~3번은 돌아야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1980~1990년대 쇠삽은 필수 청소장비였다. 자주 폭설이 내렸던 탓에 빙판을 깨야 했었다. 제설제로 쓰이는 염화칼슘이 없어 일일이 사람손을 거쳐야 했다. 막상 퇴직을 하니 김씨는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내의 보살핌에 어느덧 두 딸은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이제 아내와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김씨는 "꿋꿋하게 뒷바라지 해줘 감사하다"며 "젊어서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누려보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