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은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미술가로서의 입장과 역할을 진지하게 수행해온 인물이다. 여성의 삶을 그린 미술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그녀의 예술적 행적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도 남는다. 또한 그녀는 여성주의 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평등사회를 향한 페미니즘의 목표를 실천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이런 활동은 현대미술을 지탱해온 순수성의 개념과 당연한 전제들에 도전하는 것으로서, 한국 현대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기여했다. …(중략)… 윤석남은 미적 요소나 적절한 조형 언어의 모색 또한 주제만큼 중요하다고 믿는다. 회화와 드로잉 중심의 표현 방법은 1990년대 들어 조각과 설치로 전환되며 공간적 확장을 이루었는데, 최근에는 드로잉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다. 내용과 형식의 차원에서 그녀의 작품은 당대 여성주의 담론과 미술에서 주요 쟁점을 끌어내거나, 또는 그 담론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여성주의 미술의 새 장을 하나씩 써나가고 있다. - 김현주 추계예대 겸임교수의 '윤석남의 미술과 여성 이야기' 중에서(2008년)

▲ 윤석남 作 '1,025-사람과 사람 없이'.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씨는 2008년 1천25마리의 유기견을 소재로 전시회 '1,025-사람과 사람 없이'를 개최했다.

윤씨는 한 미디어 매체에 소개된 유기견 1천25마리를 키우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5년간 직접 나무를 깎아서 1천25개의 조각을 만들어냈다. 작가는 유기견들의 사연을 여러 느낌의 색깔과 표정으로 담아냈다. 선명한 색으로 표현된 조각은 생기가 느껴지고, 무채색의 조각품들은 아픔을, 수묵화 느낌의 어두운 조각품들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유기견들을 의미한다.

윤씨는 당시 이 작품과 페미니즘과의 관계를 이같이 설명했다.

"이 작업은 개를 다루지만 근본적으로 '보살핌'에 관한 이야기예요. 돌봄, 보살핌은 여성들의 몸과 마음에 본능처럼 새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를 돌보는 이들이 대부분 할머니들, 여성이라는 데 흥미를 느꼈어요. '왜 여성들일까' 생각하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초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로 선정돼 후속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윤씨를 만났다. 우선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최근 허리가 아프고, 폭우가 쏟아져서 아트플랫폼 작업실에 오랜만에 왔다고 했다.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각종 전시회가 끝나는 이달부터 인천과 관련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려 했는데, 우선 치료부터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윤씨는 치료를 받고 인천 곳곳을 다니며 드로잉을 많이 할 것이라고 했다.

"자유공원에서 바라보는 바다를 비롯해 인천의 항만 곳곳을 드로잉하고 싶어요. 특히 예전에 와서 본 거대한 수입 목재 하역장은 그 자체로 설치 작품이었어요. 아트플랫폼에 입주해 있는 동안 인천의 모습을 담은 창작품들을 기획중에 있습니다."

끝으로 '페미니즘 작가'로 불리는 것에 대한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윤씨는 자신의 작품이 페미니즘 미술의 틀로 해석되는 데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그는 "페미니즘 작가라고 영역이 단순화되거나 굳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연구해서 작품화하는 등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설명했다.


■작가소개

만주에서 태어난 윤석남(72)은 서예를 배우다가 40세가 넘어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주로 희생적인 삶을 산 우리 어머니와 여성의 삶을 주제로 개최한 개인전은 호평을 받았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플랫 인스티튜트 그래픽아트센터에서 공부했다. 1996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특별전에 설치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끝으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마무리됐다. 2000년대 창작품에선 평화적 공존과 소통의 회복을 촉구한다. '역사 속 여성들과의 조우'라는 테마로 소통하지 못하는 여성들의 감성적 접촉을 유도하고 있으며, '1,025-사람과 사람 없이'에선 치유와 돌봄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중섭미술상을 받았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일본, 호주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김영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