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은 치열한 해전을 거치며 무수한 주검을 남겨둔 채 겨우 그 전장을 빠져나가 자국으로 도망갔다. 그로써 임진왜란은 끝났다. 7년전쟁의 여파로 명과 일본의 정권은 바뀌었지만 조선왕조는 무사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초들이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다. 따라서 전후 보상 문제를 따져야 했다. 조선은 사신을 일본에 보내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 전쟁의 승자 입장에서 마땅한 요구였다. 그러나 그 당시 안타깝게도 섬나라 일본은 조선이 요구하는 보상금을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쓰시마 정벌론이 대두되었다. 쓰시마 정벌론을 꺼낸 사람은 황신이었다. 쓰시마 정벌을 선조에게 권한 황신의 상소는 '선조실록' 1598년 12월 21일자에 실렸다.
황신의 쓰시마 정벌론을 접한 선조의 반응은 단순했다. "소장을 비변사에 내려 신속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 날 황신의 건의를 검토한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쓰시마 정벌에 대한 의견을 올렸다. 비변사가 주장하는 것은 수성론이었다. 그것을 듣고 있던 우의정 이덕형이 "거사를 먼저 논할 것이 아니라 정탐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선정탐 후정벌을 내세웠다. 다음 날 비변사는 그들의 의견을 다시 선조에게 개진하였다. 조정은 우의정 이덕형이 주장한 대로 먼저 쓰시마에 대한 정탐을 실시하기로 했다. 신중론이 황신의 적극론을 눌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었다. 쓰시마 정벌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쉽지만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난 것이다.
며칠 전 제 93주년 3·1절을 맞아 인천시는 수봉공원 현충탑에서 '현충탑 참배행사'를 가졌다.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였던 선열들의 위업을 되새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치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필자도 인천시의원들과 함께 현충탑 참배 행사에 동참하였다. 행사 도중 한때의 쓰시마 정벌론이 다시 나의 머릿속에 되새겨지면서 은근히 화가 솟구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왜 우리는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가. 임진왜란 이후 그 때 쓰시마 정벌을 강행했다면 어땠을까?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미화되거나 합리화 될 수는 없겠지만 임진왜란 이후 300여년의 세월이 흘러 또 다시 그 후대인들이 침략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를 재차 침범해 기어코 36년간이나 한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을 상기해 볼 때 역사의 쳇바퀴 속에서 남는 교훈은 일본이야 말로 너무 믿을 수도 없고 또 다시 너무 가까이 하기엔 먼저 경계심부터 앞서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개탄스럽게도 최근에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볼 때 화가 솟구치는 심사에 우리 모두가 분명코 공감할 것이다.